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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왓슨의 삶을 돌아보며

DNA 이중나선구조의 비밀은 풀었지만

by 보현


제임스 왓슨의 사망 소식이 신문에 실렸다.

이 시대를 풍미했던 한 위대한 과학자의 사망소식에 다시 그를 조망하게 된다.

제임스 왓슨은 1953년 프란시스 크릭과 함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힌 사람이다. DNA의 구조가 밝혀짐으로써 유전자가 어떻게 복제되어 후손에 전달되는지, DNA가 어떻게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지 하는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맨델에서 시작하여 세계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유전정보를 담은 분자들의 본질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목을 매던 바로 그 일을 25살의 젊은 과학자가 해낸 것이었다. 왓슨은 그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1962년).


이때 왓슨과 크릭과 윌킨스가 나란히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지만 다른 인물들은 잊히고 제임스 왓슨만이 ‘DNA의 아버지’로 추앙을 받아온 것은 그가 DNA 구조를 밝힌 경위를 쓴 <이중나선>이라는 책을 쓴 것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이 책은 왓슨이 케임브리지대학의 캐번디시연구소에 도착(1951년)하여 물리학자인 크릭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하기까지의 뒷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 DNA의 본질을 밝히려고 치열하게 경쟁한 사람들은 제임스 왓슨을 비롯하여 모리스 윌킨스, 로잘린드 프랭클린, 라이너스 폴링, 프란시스 크릭이었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의 모형을 깔끔하게 제시함으로써 승리의 월계관은 이 두 사람에게 돌아갔다.


나는 과거 흥미롭게 읽었던 왓슨의 <이중나선>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견이 된 과학사의 뒷이야기를 이토록 발랄하게, 이토록 거침없이 써 내려간 저자의 솔직하고 어떻게 보면 방자한 글뽄새가 다시 나를 빙그레 웃게 만들었다. 그는 종횡무진 동료 과학자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여성과학자 프랭클린의 외모나 옷차림을 비방한다. 몇 번이나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면서 읽었다. 어쩌면 재기가 번뜩이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불손함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솔직한 글이 그의 매력을 더 높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나는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며 그의 앞날의 풍파가 이미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가 너무 빨리 출세하여 인생역경대학을 너무 늦은 나이에 들어서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DNA의 본질을 찾아서

왓슨은 미국 인디아나대학에서 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 후 연수과정으로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DNA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그는 연구처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캐번디시연구소로 바꾸었다. 이 연구소에서 왓슨은 운명처럼 프란시스 크릭을 만나게 된다. 물리학자인 크릭은 X선 회절법을 이용하여 헤모글로빈의 결정체를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둘 다 무명이었지만 둘은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DNA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런던 킹스대학의 모리스 윌킨스가 DNA의 분자 수준의 연구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는 X선 회절법을 이용하여 DNA의 특성을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X선이 결정에 부딪쳐 나오는 회절무늬를 분석하면 원자들이 어떤 배열로 존재하는지 알 수 있어 X선 회절법은 당시로서는 분자구조 연구의 첨단 연구방법이었다.

그런데 윌킨스가 노련한 결정학자인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을 조수로 초빙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복잡하게 증폭되었다. 월킨스는 프랭클린이 X선 회절 사진이나 잘 찍어주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DNA 구조를 밝히기를 원했다. 월킨스는 불쾌해했고 프랭클린은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러나 마나 프랭클린은 점점 해상도가 좋은 DNA 결정체의 X선 회절 사진들을 얻었다.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세계적인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도 DNA 연구에 뛰어들었다. 폴링은 DNA가 삼중의 나선 구조로 되어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크릭이 분자구조를 계산해 보았을 때 무언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윌킨스도 왓슨도 크릭도 폴링의 행보에 압박감을 느꼈다.

왓슨은 크릭과 함께 더욱 DNA 구조 분석에 골몰했다. 그들은 뉴클레오타이드(nucleotide)의 단일구조, 삼중구조 등을 예측해 보았지만 여전히 뭔가 맞지 않았다.


그때 프랭클린이 선명한 DNA X선 회절 사진을 얻었다. 이것이 과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X선 사진인 ‘photo 51’이었다. 그녀는 이 사진을 통해 DNA가 균일한 지름을 가진 규칙적으로 꼬인 두 가닥의 나선구조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

프랭클린이 눈에 가시였던 윌킨스가 그녀의 사진을 몰래 가지고 있다가 왓슨에게 슬쩍 보여주었다. 그녀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였다. DNA 구조에 고심하던 왓슨은 그 사진을 보는 순간 DNA가 이중고리구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섬광과 같이 깨달았다. 이때부터 왓슨과 크릭은 뉴클레오타이드의 원자 배열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DNA 구조의 비밀을 푸는데 집중하였다. 그들이 결정적으로 알아낸 것은 그 고리를 이어주는 네 쌍의 염기로서 A-T, G-C의 결합이었다. 이 비밀이 풀리자 그들은 모든 DNA 성분들이 완비된 모형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들에 의해 유전자 복제는 동일한 두 사슬의 DNA가 분리됨으로써 시작된다는 비밀이 밝혀졌다. DNA에서 RNA를 만들고 RNA에서 단백질을 합성한다는 센트럴 도그마(central dogma)가 발표되면서 생물학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왓슨의 영욕의 세월

<이중나선>에서 왓슨은 자신이 DNA 연구에 성공하게 되면 무슨 엄청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날까 꿈꾸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의 꿈대로 노벨상 수상 후 그의 생애는 영광의 날들이었다. 하버드대 교수를 거쳐 뉴욕주 롱아일랜드 북부 해변에 위치한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연구소를 세계 최고의 암 연구센터로 키웠다. 그리고 NIH 산하 인간게놈연구센터의 초대 소장직을 맡아 인간게놈규명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중나선>에서 보여준 것처럼 왓슨은 ‘입이 문제’였다. 그는 ‘멍청함’을 질환이라고 얘기하였고 학회에서 피부 색깔과 성욕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발표했다. 특히 인종과 지능의 연관성을 여러 차례 주장해 논란을 빚었다. 그는 2007년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흑인들이 백인과 동일한 지적 능력을 갖췄다는 전제 하에 이뤄지고 있는 서구 국가들의 아프리카 관련 정책들은 잘못됐다”며 “인종간 지능의 우열을 가리는 유전자가 앞으로 10년 안에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왓슨의 인종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발언으로 인해 구설에 올라 이후 왓슨은 각종 강연과 출판 기념회가 취소되는 등 과학계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


그 후 그가 신문지상에 다시 오른 것은 그의 노벨상 메달을 경매에 내놓으면서였다( 2014년). 그가 궁핍 해져서였던지 아니면 과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학계에서 고립된 노벨상 수상자의 반항적 제스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메달을 어떤 러시아 재벌이 410만 달러(약 55억 원)에 낙찰받은 뒤, 다시 왓슨에게 돌려주어 더 화제가 되었다. 그는 이 메달을 왓슨에게 돌려주며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은 하지 말아라”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던 왓슨이 2018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후 요양 중이라고 하더니 2025년 11월에 그의 부고가 전 세계에 전해졌다. 교통사고 후유증이라고 한다면 그는 7년을 병상에서 지낸 셈이다. ‘DNA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그의 말로가 편치 않았던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인격이 바탕이 되지 않은 재능의 말로는 이런 것인가?


프랭클린을 생각한다

왓슨이 1953년 <네이처>지에 DNA 나선구조를 밝힌 논문을 게재하면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업적을 어물쩍 넘긴 것은 지금도 과학계에서 비윤리적인 처사로 지적된다. 왓슨이나 윌킨스는 프랭클린이 고집스럽고 다른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꺼리는 막힌 연구자로 비난하고 있지만 요즈음엔 그녀의 그런 경직된 태도를 이해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는 듯하다. 우선 그녀는 여성차별이 자심했던 시대에 학문에 정진했던 여성과학자였다. 그녀는 좋은 집안 출신에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기성세대에 저항하려면 고집스럽게 자신의 연구영역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왓슨도 <이중구조> 책 말미에 그녀에 대한 평가를 새로이 하고 있다. 그녀의 킹스 대학에서 수행한 X선 연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우수성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녀는 인산기가 DNA분자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도 입증하였다. 그녀의 연구는 DNA 구조 해석의 턱밑까지 다달았지만 결실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업적으로 왓슨이 DNA 구조를 해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죽었다. X선 과다노출로 37세의 아까운 나이에 난소암으로 사망한 것이었다(1958년). 그래서 왓슨과 크릭, 윌킨스가 노벨상을 받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같은 여성 과학자로서 플랭클린의 처지가 참으로 애석하게 여겨진다. 다행히도 근래에 그녀에 대한 평가가 새로워지는 모양이라 약간 위로가 되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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