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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허생 Jun 23. 2017

맥콜, 일탈


가끔 머리 속에 항아리가 있다고 상상하곤 한다. 저마다 정수리보다 약간 앞쪽에 하나씩 말이다. 그 크기는, 사람마다 다른 게 좋겠다. 간장 종지만 한 사람이 있고 큰 항아리인 사람도 있고. 


매일 스트레스 혹은 피로가 쌓이면 항아리에 물이 찬다. 비가 오거나 이슬이 맺히는 것처럼 자연스레 생겨나는 물도 있고, 누군가 들이붓는 물도 있다. 가끔은 셀프로 물을 붓는 경우도 있다.


항아리의 물은 스스로 줄어들지 않는다. 잠잘 때 항아리를 잠시 내려놓으면 조금씩 증발하긴 하지만, 무척 미미한 양이다. 해서 항아리의 물은 매일 조금씩 늘어난다. 물이 찰랑찰랑할 정도로 차면, 항아리가 무거워져 머리가 아파진다. 마이 아파진다. 그때, 항아리를 내동댕이쳐 깨버려야 한다. 일탈이다. 술을 진탕 마시거나,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지름신을 불러내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렇게 가득 찬 항아리를 깨버리고 나면 새로운 항아리를 머리에 일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꽤 가까운 거리가 되면, 이 사람은 무슨 방법으로 항아리를 깰까 궁금해진다. 그 사람의 항아리 크기도 궁금하긴 하지만, 오래 지켜봐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니 우선 항아리 깨기에 집중한다. 분명 자기 나름의 방법이 있을 테다. 나는 물이 가득 차서 항아리를 던져 깨버려야 할 때, 그 사람의 본모습 중 하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주변 사람들의 항아리가 깨지는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다. 물론, 내가 깨주는 건 싫다).


나도 내 나름대로 항아리 깨는 방법을 찾았다. 찾았다기 보단, 우연히 주어졌다. 나는 머리에 이고 있는 무거운 항아리를 깨고 싶으면 맥콜을 마신다. 맥콜. 맞다. 파란색 흰색이 촌스럽게 섞여 있는 그 탄산음료. 그걸 마시는 일이 나에게는 일탈이고, 항아리 깨기다.



어쩌다 맥콜을 마시는 것이 일탈이 되었는지 설명하자면 10년도 더 된 기억을 끄집어내야 한다. 중학생 시절, (지금도 그러하지만) 공부하기를 지지리도 싫어라 했었다. 어찌어찌 반에서 중위권 성적은 겨우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온라인게임에 빠져 연일 폭락장을 연출하던 바로 그 시절이다.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종합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을 두루 배웠는데, 매주 주말평가 시험을 봤고 그 성적으로 매달 반을 배정하던 짜증 나는 학원이었다. 나름 수준별 학습을 도입하여 신 경영을 한 셈이었다. 1반부터 5반까지 있었는데, 내 점수는 3반과 4반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과목별 성적으로 반을 편성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점수를 평균 내서 반을 편성했던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일반적인 학생의 경우엔 문제 될 것이 없는 시스템이다. 국어를 잘하는 학생이 수학도 영어도 잘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어릴 적부터 (역시 지금도 그러하지만) 하고 싶은 것만 해왔던 나에게는 무척 불합리한 구조였다. 내 점수는 이랬다. 국어와 영어는 1반에 갈 성적을 유지했고, 사회는 보통 정도 했으며, 수학과 과학은 5반에 들 성적이었다. 특히 수학은 5반에서도 진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지독하게 못했다. 그러니 평균 점수는 3반에 맞게 나오는데 듣는 수업은 어느 것 하나 맞질 않게 된 것이다. 


지루하거나, 너무 어려운 수업에 적응하지 못했고 점점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레벨 문제가 아니라 학원 자체가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친구랑 떠들다가 손바닥을 맞거나 복도로 쫓겨나기 일쑤였다. 자연히 학원과 멀어지게 되었고, 학원에 가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학원에 가는 길엔 우울하기 그지없었고, 지각도 밥 먹듯 했다. 학원이 끝나는 밤엔 (공부는 하지도 않았으면서) 녹초가 돼서 힘들다, 우울하다를 되뇌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에서 선생님께 된통 혼나고, 혼자 남아 수학 재시험을 보고 있었다. 재시험에 재시험에 재시험이 이어졌고, 한 번 더 재시험을 본 후에 선생님이 퇴근할 시간이 돼서야 학원을 나설 수 있었다. 깊은 시련에 빠져(대략 우울+자기비하+빡침+슬픔+외롭+배고픔)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중,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맥콜이라는 음료수가 있는데, 그게 맥주 콜라거든. 맥주랑 똑같은 맛이래.”


먹어본 적도 없는 그 음료수의 이름이 어쩌다 갑자기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맥콜을 먹어야겠다는, 아니,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일탈이다. 동네 슈퍼에 가서 흰색, 파란색이 촌스럽게 새겨진 맥콜을 500원 주고 샀다. 그리곤 혼자 집까지 걸어가는 10분 동안 맥콜을 홀짝홀짝 마셨다. ‘아, 이런 게 인생의 쓴맛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중학생 때 이미 술, 담배를 뗀 아이들이 수두룩했지만, 나는 술이나 담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순수한 아이였다(지금도 그러하다). 그런 내가 맥주 맛과 비슷한 맥콜을 마신다는 건 엄청난 일탈이었다. 그렇게 인생의 쓴맛을 한 캔 비우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혹시 얼굴이 빨개지진 않았나, 손을 대 볼 정도였으니까. 그 날 이후로 학원에서 혼자 남아 재시험을 치거나, 손바닥을 많이 맞는 우울한 날에는 맥콜을 마시며 집에 돌아왔다.


그때 그 경험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지금도 짜증 나거나 힘들거나 외롭거나 우울한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맥콜 생각이 난다. 취하는 것도 필름이 끊기는 것도 아닌데(달라진 게 있다면 500원이던 맥콜이 1200원이 되었다는 것뿐). 흡연자들이 담배를 찾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그마저도 비흡연자라 어떤 기분인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맥콜은 여전히 맛없는 음료지만, 한 캔 마시며 걷다 보면 '아, 이제 일탈은 할 만큼 했다'는 기분이다. 그러면서 묘하게 힘이 난다. 아니, 힘이 난다기 보단 뭔가 비워진 느낌이다. 


'맥콜 일탈'이 언제까지 통할지 모르겠지만, 이거, 퍽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되도록 오래, 맥콜 회사가 망하기 전까지 계에에속 이 방법을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P.S.


살면서 한 번도 맥콜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맛없는 음료가 어떻게 지금까지 필리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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