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
도쿄에 있다가 오카야마, 후쿠오카를 거처 쿠마모토에 도착했다.
여행할 때 그 나라 아티스트 음악을 듣는 편이다. 쿠마모토에는 100년은 됨직한 전차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전차 바닥이 나무였다. 규격을 이탈한 나무판들이 자투리 철판으로 용접되어 있는 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자니 류이치 사카모토가 생각났다. 좋아하는 곡을 틀었다. 오래된 전차 바닥 감상에 적합했다.
다음 재생곡 알고리즘에 그의 젊은 시절 얼굴이 있는 앨범 커버가 뜨길래 가만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도 이런 미친 분위기의 소유자였구나. 세상엔 멋진 인간들이 너무 많다.
친절
일본 사람들은 친절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친절은 어딘가 안면 근육에 국한된 느낌에 이 사람들의 마음이 멀쩡할지 가끔 걱정이 되었다. 그중에는 자연스러운 것도 많았다. 오카야마에서 큰 형부 따라갔던 메밀소바집 사람들이 그랬다. 복숭아 술을 내오는 방식에 대해서 한참을 신나게 설명하는 모습이 좋았다.
조카
어제 후쿠오카 역에는 둘째 조카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규슈대학교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 곧 졸업이라 석사과정을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도 여러 개 하고 있다고 했다.
조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자꾸 고였다. 마이쮸 좋아하던 애기가 너무 잘 큰 어른이 된 것이다. 이모가 후쿠오카에서 잘 있도록 어느 지역이 위험한지 - 후쿠오카에 있는 동안 '나까쓰'에 가지 말라고 했다 - 어디가 좋은 지도 설명해 줬다. 연구실과 일터에서 어떤 게 힘들고 재밌는지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용을 써가며 이야기했다. 남편은 주로 영어로, 나는 한국어로 했기 때문이다.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일본어도 짧고 조카 한국말도 부족해서 손발로 대화를 이어갔지만 마음은 통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을 키워낸 큰언니에게 존경이 절로 솟았다.
내가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 갈 때면 둘째 언니와 셋째 언니는 동대구역에 나를 내려다 주며 맨날 울었다. 나는 또 보면 된다 생각하고 그닥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웬일인지 조카를 보니 눈물이 났다. 어린 생명체가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자연의 섭리도 있겠지만 내가 젊어서 한 고생은 그냥 할만하고 재밌다 생각했는데 조카가 고생하는 걸 보니 애렸다.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며 재밌게 사는데도 그랬다.
언니들의 동대구역처럼 나는 하카타역에서 조카를 보내고 흐느꼈다. 흐느낌은 감사의 눈물인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조카가 건강하고 자기 앞가림하는 사람이 된 것이 그저 감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