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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

by ACCIGRAPHY




집이다.


순조로운 시차적응은 내 삶이 쉬이 허락하지 않는 것 중 하나이므로 하루 만에 멀쩡해지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지금 시각은 새벽 3:04. 남편과 동시에 2시 정도에 깼는데 그는 자려고 용을 쓰는 중이고 나는 거실로 나와 불을 켰다. 각자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매 순간 드러난다.


눈 뜬 김에 나는 새날을 맞이한다. 10분 뒤엔 커피도 마실 예정이다. 큰 형부가 사준 인도네시아산 커피인데 어제 오후에 한번 마셔보고 반해버렸다. 어제 그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면 나는 장시간 비행으로 인한 피로로 하염없이 좀비처럼 집안을 돌아다니며 남편에게 시비를 걸었을 것이다.




한 달 정도 한국과 일본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곳을 돌아다녔다.

꿈같았다. 쓰고 싶은 말이 차고 넘치는 나날들이었으나 숙소로 돌아오면 뻗어버려 신선한 재료들을 손도 못 댄 채 매일 밤 꿈속으로 흘려보내는 기분이었다. 여독이 풀리는 과정에서 흘러가 버린 것들이 다시 나올 수도 있지만 조바심은 없다. 나와야 하는 말들은 알아서 나오겠지 하며 마음을 푹 놓는다.


엇.

방심했더니 벌써 하나가 떠오른다.

큰 시누 남편.


큰 시누 남편을 뭐라 불러야 할지 새벽의 몽롱함을 걷어내며 생각을 굴려본다. 내 속의 무언가가 ‘큰 아주버님!'하고 외친다. 약간의 의구심이 들지만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에 관한 얘기를 작년 땡스기빙 때 한 두 문장 정도 언급했던 것 같다. 작가(시각미술)이고 나와 함께 시댁에서 아티스트 그룹으로 분류되어 별난 성향이 다소 용인되는 존재.


시댁 식구들은 헤어졌다 뭉쳤다를 반복하며 일본여행을 하다가 마지막 3일은 온 가족이 나리타에 모였다.


호텔 1층에서 단품으로 파는 돈코츠 라면이 맛있었다. 큰 형부가 데리고 갔던 미슐랭 라면집에 비견할만한 맛이었다. 나는 3일 내내 그 돈코츠 라면을 먹었는데 남편의 동석 여부를 떠나 나는 그 라면에 꽂혀있었으므로 그날도 어김없이 혼자 라면을 먹고 있었다. 국물이 짜서 뜨거운 물을 받으러 뷔페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라면 먹을만해요?"

(영어로 했지만 말투가 이랬음)


"어! 내려오셨네요? 세븐일레븐 주먹밥 먹겠다더니!?"


큰 아주버님이었다. 마음속 깊이 어색할 각오를 다지며 정황상 내 테이블로 동석을 제안했다. 다른 가족들 없이 그와 단독으로 얘기를 해 볼 일이 지난 10년 간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라면을, 그는 교자를 먹으며 대화를 시작했는데 볼수록 재밌는 사람이었다. 예민하고 웃긴 것이 내 친구들과 유사 재질이었고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이 사람과 대화 없이 흘려버린 지난 10년이 야속해지기 시작했다. 시댁 식구 중에 웃긴 사람이 있다니...! 랜덤으로 걸어 들어간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인디밴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시댁 식구들과 뭉쳐 있었을 때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자아를 방출했다. 그의 둘째 딸이자 내 최애 시조카인 리씨 흉내를 내는데 나는 라면 먹다 여러 번 뿜을 위기에 처했고, 자기 부인 자랑으로 시작해 현재 하고 있는 그림 작업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눴다. 그는 흉내에 일가견이 있었다. 리씨가 자기 부모 결혼식에 꼭 가고 싶었으나 - 귀엽지만 명석하진 않은 편 - 못 갔다며 자기 없이 부모가 결혼식 올린 것에 대해 대성통곡한 얘기를 해 주는데 스토리텔링의 완급, 발성, 표정 연기가 특히 탁월했다.


호텔 직원이 영업 종료를 알리고 나서야 슬슬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니 남편이 놀래서 물었다.


"폴이랑 아까 식당에서 만나서 지금까지 얘기한 거야?!"


"어."


"폴이랑 할 얘기가 있어?!"


"어. 완전 재밌었어. 폴 너무 웃겨."


"폴이 웃기다고?!"


"어. 당신은 안 웃겨?"


"어... 웃기단 생각은 안 해봤는데... 아니 근데 세 시간이나 할 얘기가 있어?"


남편의 반응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큰 아주버님의 시댁 이미지는 까칠하고 자기 세계에 충실한 전형적 아티스트로 도통 웃는 법이 없었고 조용했다. 남편은 자형이 자기에게 보여준 적 없는 웃긴 모습을 나에게 방출한 것이 샘이 났는지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남편의 못마땅한 표정이 자꾸만 떠올라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큰 언니네 집에서 키우는 토끼. 배고픈데 밥 안 주면 다다미를 뜯어먹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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