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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ua

4:54

by ACCIGRAPHY






받은 것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내가 받은 것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며칠 째 잠을 못 자도 멀쩡히 숨 쉬고 밥도 들어가고... 운동복 입고 밖에 나가 햇볕 쬘 힘도 있고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몸을 일으켜 커피도 내려 마신다.


기적 아닌가.

필요한 걸 다 받았다.

나흘 째 잠을 못 자서 미친 건가 싶기도.

뭐 어때.





폐활량의 쓸모


시댁 식구들과 수영을 한다.


남편은 서 있는 상태에서 수평으로 다이빙하듯 입수해서는 잠영으로 반대편까지 도달한 후 드라마틱한 손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긴다.


얼굴이 담백하게 생겨서 망정이지 다소 느끼했다. 나는 그런 현란한 동작은 할 줄 모르므로 한 걸음씩 계단으로 물에 들어갔다. 발목에서 가슴팍으로 서서히 차오르는 물의 온도와 수압이 적당히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도전의식 올라온 김에 나는 조카들에게 물속에서 숨 참기 시합을 하자고 했다. 좋다고 난리다. 시댁에선 내가 조카들이랑 잘 놀아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그들과 그냥 노는 것이다. 나 재밌자고 사리사욕 채우는 건데 시댁에서 호평을 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남편은 으레 자기는 심판이겠거니 하는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본다. 심판의 신호에 따라 바닥을 향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눈을 감는다. 이야기 주인공이 되면 숨을 오래 참을 수 있기에 나는 꼬리지느러미만을 이용하여 미역숲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목적이 있어도 무방할 것 같아 굴을 찾기로 했다. 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에 온통 보라색 성게가 깔려있었는데 징그럽고 예뻤다. 물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돌돌 단체로 굴러다니는 모습이 토토로 먼지귀신같았다. 귀에서는 곧 조 히사이시 음악이 흘렀고 신나서 옆구리에서 돋아난 지느러미들은 리듬에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가며 바다 구경을 시켜주었다. '나는 돌이요'하며 시치미 떼는 문어와 바닥에서 콩나물처럼 솟아있는 정원장어들이 특히 인상 깊었다.


한참을 정신 놓고 구경하다 숨을 좀 쉬어야겠다는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아무도 없다. 조카들은 서로를 향해 물을 튀기는 중이고 남편은 애들 노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멀뚱히 정원장어처럼 솟아있는 나를 본 남편이 소리쳤다.



"당신이 이겼어! 2분 넘었어!"



20분은 족히 넘은 느낌이었는데 2분밖에 안 됐다니 실망스러웠다. 불현듯 찾아온 결핍감에 나는 뭔가 아름다운 것을 눈에 넣고 싶어서 한 백인 할아버지의 수영하는 자세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람한 체구에서 나오는 우아한 동작이 몸으로 짓는 시 같았다. 물 표면에서의 모습과 아래의 모습이 왠지 다를 것 같아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며 물속으로 꺼져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할아버지 움직임을 관찰했다.


물 위에서 사선으로 포물선을 그리던 손은 물속에서 직각으로 깊이 꽂혔고 그 리듬에 따라 지느러미처럼 발을 샤라락- 샤라락- 움직였다. 발을 계속 움직이는 게 아니라 손이 꽂힐 때만 합동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한참을 쳐다보다 할아버지 영법을 시도해 보았다. 수영장 끝에서 끝까지 한 번에 가본 적이 없었던 나는 생전 처음으로 무리 없이 이 행위를 성공하기에 이른다. 이 영광의 순간을 누가 좀 봐주면 참 뿌듯할 텐데 싶은 찰나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남편이 정원장어처럼 멀뚱히 솟은 채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IMG_6578.HEIC 집 떠날 때 싹만 올라와 있던 주키니가 여행에서 돌아오니 다섯 개나 달려있다. 귀여워서 사진을 백장 찍었으나 한 장만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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