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ttle Randy
이제 겨우 시차적응을 할랑 말랑하는데 남편이 시댁을 가자고 한다.
장거리 이동으로 인한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활력의 엉김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던 흐름이 다시 무너진다.
아빠 컴퓨터 모니터도 교체해 주고 차 내부 청소도 하고 싶은데 장비가 둘째 누나 집에 다 있으니 가야 한단다. 그냥 '가족들 보고 싶다'하면 내 귀가 활짝 열릴 텐데... 마치 컴퓨터 교체나 차 청소 따위가 나에게 더 설득력 있으리라 10년째 믿고 있는 남편을 멍하니 바라본다. 다급해진 남편은 무리수를 던진다.
"대신 누나들이랑 가기로 했던 노동절 캠핑은 가지 말자."
그의 의식의 흐름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캠핑을 왜 안 가... 당신은 누나들이랑 캠핑 안 가고 싶어? 사람이 타이밍을 좀 보고 움직여야지 나흘 전까지 같이 있었는데 암만 가족이라도 뭘 또 보러 가냐 이 사람아... 누나들은 애기들까지 줄줄 데리고 여행했는데 얼마나 피곤하겠어. 우리 가면 또 청소해야 되고 민폐야."
인간관계의 흐름과 리듬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안 갈 행동이었으나 결혼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므로 다 내려놓고 차에 올라타며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 깜냥을 벗어난 배려를 베풀고 있다. 곧 탈이 날 것이다.'
시댁에 와서 시부모님께 간단히 인사를 드리고 하루종일 드러누워 있었다.
기분 탈 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한 없이 오랜 세월 누워있다 일어나 시어머니표 샐러드를 먹었다. 플렉시드 가루와 몸에 좋은 각종 식초, 레몬 제스트가 흩뿌려진 드레싱이 일품이었는데, 일반인의 입에 극도로 새그라울 법했지만 나는 마음에 들었다. 새그라움은 정신적 먼지를 탈탈 털어내는 효과가 있으므로 입안 가득 머금고 와구와구 신나게 먹었다.
입맛이 돌았다. 새그라움은 그런 것이다. 냉장고를 열어 나또를 하나 꺼낸 후 흰쌀밥 위에 올렸다. 한껏 호화된 쌀밥 위에 단백질과 유산균으로 득실대는 나또를 비비기 시작하자 솜사탕 기계가 뿜은 듯한 찐득한 실로 밥이 포위된다. 뱃속에 섬유질과 새그라움, 유산균 수억 마리를 넣은 후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자 탈 날 것 같은 기분이 제압되었다. 쇼펜하우어가 맞았다. 상당량의 인간 번뇌는 잘 자고 잘 먹으면 없던 일이 된다. 시댁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친구에게 문자를 했다.
'내일 우리 시댁에 밥 먹으러 와. 큰 시누도 애기 데리고 오라고 할게. 놀자!'
못 이기는 척 차에 탄 이유 중 하나는 내 친구가 시댁 가까이 살기 때문이다.
시댁에 올 때마다 보다 보니 시누들과도 연이 생겨 나 없이도 서로 만나 노는 사이가 되었다. 한국 같으면 며느리 친구가 시댁 식구들과 친해지는 그림이 생뚱맞지만 미국은 그런 면에서 열려있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공간적으로는 여행을, 시간적으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나는 나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 물론 이런 번거로움 없이도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혜를 얻겠지만 나는 물리적 부딪힘이 있어야 내 것이 되는 것 같았다. 물을 알고 싶으면 물을 만나러 갔고 누군가가 궁금하면 말을 걸었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여러모로 부딪힐 기회가 많은 이런 환경이 주어짐에 감사하다. 주어졌다고 하나 내가 내 발로 끊임없이 찾아온 부분도 있다.
연어를 사야겠다. 큰 시누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하고 유진이도 좋아한다. 예민이는 임신을 했으니 내일 고기를 구워줘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 재밌다. 이런 생각이 재밌으려면 삶을 너무 바쁘지 않게 해 놔야 한다. 빈 공간을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일을 세 개를 받을 수 있지만 하나만 받아야 한다.
그래야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말을 걸어보고 그들과 연결감을 느끼는 일이 온몸에 피가 통하는 것 같은 생명 운동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야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신난 표정으로 연어를 사러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