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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ACCI Jan 13. 2023

겨울 장마는 지나갔지만

내 동네 돌리도


너무 할 일이 많아서 뭘 먼저 해야 할지 하루종일 서성대기만 하는 그런 날이 있다.


정신을 다잡으며 하나씩 해 보려 해도 하나를 붙잡는 순간 다른 더 중요한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져나가듯 달아나는 느낌이 반복된다.


그런 날도 나름의 맛이 있지만 그러다 지는 해를 보면 살짝 자괴감이 들어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저 지는 해는 뜨는 해다. 지금부터 살면 된다.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았다.'


어!

굿모닝이다!


이러다 보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면서 다시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지는 해를 보며 굿모닝을 외치고 엊그제 벽에서 내렸던 캔버스에 젯소칠을 마무리했다.


'슥슥슥' 붓 소리가 나에게 말한다.

'시간 낭비 따위는 없다. 세상에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곤 없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잔잔하게 할 뿐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중요한 일 따위 없다.'



퍼포먼스 때 사용했던 돼도 안 한 색 조합을 흰색으로 덮어버렸다. 제법 균일하게 잘 덮은 것 같다. 나도 남편을 닮아 뭔가를 얇게 코팅하는 것을 잘하나 보다.


남편에게 설거지란 그릇들을 세제로 얇게 코팅하는 것이고 세차란 세제 물로 차를 얇게 코팅하는 것이다.


그런 그를 사랑한다.




우리 동네에 열흘 간 비가 쏟아졌다.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다가 내친김에 좀 더 뻗어 암막커튼 밑자락을 살짝 들춰 올렸다.

손톱만 한 틈새로 황금 오렌지 햇살이 왜 이제 들추냐며 신나게 쳐들어온다. 태양의 힘으로 몸과 정신을 굴리는 나에게 이만한 선물도 없다.


벌떡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창가에 서서 굶주린 수정체에 햇살을 한가득 넣는다. 어떤 과학자는 이러고 태양을 보다가 눈을 잃을 뻔했다기에 감히 아이컨택은 하지 않는다.

그냥 빛만 내 눈알에 투과시킴으로 신체 호르몬에 아침이라고 공지한다.


밖에 나가보니 평소 허벅지 근육 단련을 위해 애용하던 계단이 폐쇄되었고 강아지들이 뛰 노는 도그파크 일부 표지판이 홍수로 인해 부러져있다.


지난 5년간 동네의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영원한 건 없다지만 정말 영원한 건 없네.




좋아하는 계단이다. 평소에 한 칸씩 올라가면서 다육이들도 쳐다보고 남의 집 어떻게 해놓고 사나 몰래 힐끗 보기도 한다. 이렇게 흉흉하게 줄이 쳐져있으니 애잔함이 더해져 더 예뻐보인다.




글 마무리를 위해 생각이 모아지던 찰나 남편이 소리친다.


"나 이거 등 마사지 쿠폰 쓸래!"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선물로 발행해 줬던 마사지 쿠폰을 지금 쓰겠다고 들고 온다.


'발행'이라 해봤자 집에 돌아다니는 종이 잘라서 손으로 글씨 써서 준거다.


나는 유효기간 지났다고 칼거절 멘트를 날리려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대답한다.


"어!"




체중을 잔뜩 실어서 남편 등을 팔꿈치로 쫘악 눌러본다.


남편 얼굴을 보니 또 풀 뜯어먹는 행복한 쿼카로 변해 있다.


 얼굴을 보니 오늘  일이 이거였구나 싶다. 손가락 사이로 놓쳐버리는 중요한 일이 다름 아닌 이런거구나 싶다.




<Do Your Thing>  예전 살던 집 창문에 적어놨던 말, 유리에 아크릴 물감,  ACCI CALLIGRAPHY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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