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호박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예뻐서 문화충격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너무 예쁘고 반들반들해서 다 이벤트 소품인 줄 알았다. 너무 예쁜데 심지어 종류도 천차만별이라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호박이 뭐 이렇게 생겼지 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 이미 감흥 없는 단계에 도달하여 이것들을 어떻게 버리지 않고 다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깊다.
나는 핼러윈 시즌을 좋아하지 않는다.
산책에 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산책이란 자동차가 주유소에 가는 행위와 같기에 삶에 큰 지장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식으로 방해가 되는고 하니, 평소에 아기자기하고 독특한 정원들로 내 눈을 즐겁게 해 주던 동네가 음산한 테마파크로 변신하는데 여기까지는 참을만하다. 전체적 음산함은 이겨낼 수 있다. 내가 못 이기는 것은 갑자기 눈에 띄는 부분 장식들이다.
가다가 깜짝깜짝 놀래는 것이다.
안 겪어본 사람들은 모른다. 이게 얼마나 화가 나는 일이냐면, 나는 지금 너무 놀랬고 징그러워 죽겠는데 허공에 화를 낼 수도 없고, 달아놓은 사람한테 화를 낼 수도 없어서 더 화가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겨우 진정하고 좀 갈라치면 더 심한 놈이 또 기다리고 있다. 이 정도면 산책이 아니라 고문이다.
우리 동네는 할리우드와 가까워서 극작가나 배우, 세트연출 같은 창조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산다. 그래서 핼러윈 장식도 다른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괴랄한 것들이 창궐하는데 사람들이 서로 놀래키는 것에 이렇게 진심일 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이렇게 호박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날이 오면 동네가 원래대로 예뻐졌다는 신호다.
맘 놓고 산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식에 사용한 호박으로 보통 호박파이를 만들지만 나는 한국사람이므로, 그리고 대구사람이므로 경상도식 호박죽을 만들 예정이다. 새알도 만들어서 동동 띄우고 팥이 없으니 검은콩도 몇 알 넣어봐야겠다.
우리 엄마는 새알을 만드는 대신 찹쌀풀을 되직하게 해서 숟가락으로 설렁설렁 떠 넣으셨는데 호박죽 먹다가 한 번씩 씹히면 쫀득 달근하니 맛있었다.
미국 호박이 암만 예뻐도 나는 내가 보고자란 늙은 호박이 더 좋다. 한국의 늙은 호박은 뭔가 인생을 좀 아는 사람의 분위기가 난다. 미국 호박은 아직 풍파를 맞아보지 않아 해맑기만 하다.
#실버레이크 #a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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