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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ACCI Dec 09. 2022

여보, 나 방금 잭 블랙이랑 학부형 상담 했어.

실버레이크 평행우주

남편은 웨스트 헐리우드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다.


학기 막바지라 수업은 마무리되고, 한 학기 수업이 어땠는지 학부형과 공유하는 상담만 진행되는 모양이다. 남편은 오늘 집에서 재택근무를 했는데, 학생들의 문제점이나 개선 방향을 최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학부형들과 공유하느라 용을 쓰고 있다.


삐질삐질 땀냄새가

거실까지 풍겨오는 듯하다.




"자기야,

나 방금 잭 블랙이랑 학부형 상담했어."


작년 이맘때 일이다.


그 학교에는 유난히 독특한 집안 자제들이 많은데 작년에 남편은 잭 블랙 아들을 가르쳤고, 올해는 내가 한 때 사랑했던 미국 밴드 더 스트록스 (The Strokes)의 베이시스트 아들내미가 남편 학생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 1분 거리에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 (Red Hot Chili Peppers)의 드러머가 운영하는 클럽도 있다.


잠시 생각해본다.


대구에서 태어난 나는 지금

도대체 어떤 유니버스에 살고 있단 말인가?




중학생 때 나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좋아했다.


공부를 좋아했으나 수업은 싫어했던 나는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 교복 깃과 머리카락을 활용하여 이어폰을 교묘하게 숨긴 채 그들의 음악을 듣곤 했는데, 피를 펄펄 끓게 하는 그들의 음악과, 지루해서 피가 거꾸로 솟는 수학 시간의 극명한 대비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친구들 책상 위를 퐁당퐁당 뛰어다니며 헤드뱅잉을 하고 싶게 만들었다.


물론 나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대신 창 밖을 보며 이런 상상을 자주 했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서 어떻게 자랐길래 이런 음악을 만드는 걸까?'


'나도 언젠가 거기 가 볼 수 있을까?'


'궁금하다. 참을 수가 없다!'




그렇게 궁금해하던 그곳에 지금 나는 살고 있다. 신기하고 기가 차서 매일 산책하면서 헛웃음이 난다.


5년쯤 됐으면 이제 그만 기가 찰만도 한데 나란 인간은 일일일생(一日一生)을 모토로 살다 보니 신기하게도 매일 기가 찬다.


잘 때마다 매일 내 옆에 누워있는 남편도

10년째 기가 차는 중인데 뭘.




작년 이 맘 때 남편과의 대화:


"진짜?! 어땠어? 옛날에 무한도전에 나왔을 때처럼 진짜 그래?!"


"어 사람 좋더라. 느긋하고 친절한 말투에다가 가끔씩 한 두 마디 웃긴 소리를 하는데 그냥 스크린에서 보던 거랑 비슷했어."


"잭 블랙도 학부형이구나. 너무 신기하다!"


"근데 처음에 영상회의 시작할 때 잭 블랙이 화면에 뜨면서  '안녕! 난 잭이야'라고 하는데 뭔가 비현실적 느낌이 들면서 정신줄 놓을 뻔했잖아 (웃음)... 간신히 정신 차리고 아들 얘기 시작했지."


"잭 블랙 아들 어때?"


"어 완전 착하고 스윗해. 친구들도 많고!"


"세상에, 당신 학교 너무 신기해! 나 언제 한번 구경 갈래!"


"학기 끝날 때마다 파티한다고 같이 가자고 해도 한 번도 안 따라왔으면서 구경은... 진심이야!?"


"아니! 그냥 신기해서 해본 소리야. 거기 사립이면 학비 비싸? 얼만데?"


"사천 오백만 원 정도($35,000)? 그 동네 사립 치고는 싼 편이야."


"사백도 아니고 사천?! 한 학기에 사천?!"




최근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를 보다가 돌멩이 대화 장면에서 펑펑 울었다.


거기 나오는 모든 버전의 삶의 순간들이 감격스러웠지만 하필이면 내가 돌멩이를 심히 좋아하는 바람에 돌멩이에 감정이입되어버린 것이었다.


이 동네에서 이 모습으로 사는 이 버전의 나는 요즘도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들으며 친구들 책상 위에 올라가 헤드뱅잉을 한다.


그때 자주 듣던 그들의 노래 중 하나가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였다.


하루 한 인생 (어른체_shale) 1000 X 1000 px, Procreate 작업, ACCI CALLIGRAPHY 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everythingeverywhereallato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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