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아- 내민 두 손 위로 세찬 물줄기가 쏟아진다. 초록빛 물비누를 가득 짜서 깨끗이 문질러 씻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손을 탁탁 털고, 비치된 페이퍼 타올에 손을 뻗다 말고 멈칫했다.
희멀건 손등 위로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복잡하게 얽혀 뻗어나간 것이 푸르게 돋아난 핏줄과 뒤섞여 어지럽다. 그의 손등 위로 솟아오른 강인한 핏줄. 기대어 키스하던 담벼락 위로 만발해 있던 담쟁이덩굴. 늦은 오후 카페에 마주앉아 휘젓던, 머그컵 속의 엷은 크레마. 갖가지 기억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라 머릿속을, 온 몸을. 발 딛고 선 하얗게 얼어붙은 공간을 가득 지배한다. 그대로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아 버렸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뱉는 고통에 찬 울음이, 에워싼 공기마저 둥둥 울리는 둔탁하고 거친 울림이 내 것인지, 나만큼이나 서러운 타인의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나의 세상이 울고 있다. 절박하게, 구슬프게 몸부림치며 흐느끼고 있다. 감싸 안아 달래주고 싶어도 그럴 경황이 없다. 그 속에 들어앉아 함께 흔들리며 꺽꺽, 짐승 같은 소리를 낼 뿐이다.
너는 어디에 있니. 잘 살고 있니. 나는 이 모양 이 꼴인데. 너는 어떠니. 너도 조금은 아프니. 가끔, 아주 가끔 나를 떠올리며 어둑한 하늘을 향해 한숨짓니. 차라리 너도 죽을 만큼 괴로웠으면 좋겠다. 사랑은 같이 했는데 아픈 건 나 혼자라는 거. 그거 되게 억울하거든.
오늘도 나는 천재지변이 난 듯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도무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너의 환영을 마주하며. 피에 젖은 손을 들어 붉게 펄떡이는 심장을 도려낸다. 나의 사랑을, 갈 곳 잃은 나의 눈물을.
매년 계절이 바뀌면 겪는 일이었지만. 바로 어제의 일도 자주 잊어버리고 마는 나는 여지없이 여름이 되면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다 막상 겨울이 되면, 또다시 여름의 숨 막히는 더위를 잊곤 했다. 그래서 여름도, 겨울도. 내겐 늘 처음 같았다. 신선한 만큼 힘들었고, 경이로운 만큼 아팠다.
매번 사랑을 하면서 겪은 일이었음에도, 너를 사랑할 땐 미처 몰랐다. 우리에게도 잔인한 끝은, 오고야 말 거라는 걸.
저 바깥의 떠들썩한 세상과 고요한 나 사이를 가르는 얇고 투명한 유리. 공간은 물론 시간마저 갈라버린 듯한 그 너머로, 달이 시리게 빛났다.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아 가만히 손바닥을 펴보였다. 손끝으로 하얀 빛이 내려앉는다. 차갑다. 움켜쥐어 보려 해도, 손등을 훑을 뿐 쉬이 붙잡혀주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너와의 추억처럼, 손 한 번 휘저으면 사라질 담배 연기처럼. 모든 것이 허망하게 공기 중으로 흩날린다.
그 무렵의 나는 늘 손이 차가웠다.
그걸 늘 걱정했던 너는 만나면 손부터 내밀었다. 서로의 체온이 비슷해질 때까지 놓지 않던 단단함이 좋았다.
“이제 따뜻해졌다.”
호호 불어주길 한참, 따뜻해진 내 손을 꼭 부여잡고 작게 중얼거리던 네가 눈물이 핑 돌 만큼 좋았다.
“계속 네가 잡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놓으면 또 금방 차가워질 걸, 뭐 하러.”
네가 나를 걱정해준다는 것이, 아껴준다는 것이 그 시절의 나는 받아들이기가 벅찼다. 여유롭게 사랑하긴 커녕, 하루하루 너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내는 것조차 힘들었다. 너무 오랫동안 너를 동경해온 탓일까. 속으로만 품어왔던 사랑이 버릇이 되어 버려서 그랬을까.
“그럼 계-속 잡고 있으면 되지.”
씩 웃으며 손을 꼭 잡아 코트 주머니에 넣어버리는 너의 말에 많이 기뻤었다. 가슴이 아릴만큼 행복했다. 계속. 계속. 그때의 나는 우리가 계속 사랑하리라 확신했었던 것 같다. 네가 말한 ‘계속’이 나의 ‘계속’과 같을 줄로만 알았다.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함께 할 평생을 기약하는 의미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나의 사랑만 계속, 이었나보다.
꽁꽁 얼어붙은 손끝을 녹이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손이 가슴팍을 움켜쥔다. 또다시 터져 나오는 울음이, 아득해져가는 머릿속이. 아직도 내 세상의 끝은 여지없이 너에게로 닿아, 나는 이렇게 또 무너지고 만다.
사랑했다, 아주 많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미쳐있었다.
정말 좋아했다. 너를.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보다 완벽하다 믿었던 너를 잃고, 이제와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 완벽과 영원이란 달콤함을 지나치게 누려왔던 대가일까.
미안하다. 미련 없이 떠나지 못해서. 그토록 사랑했던 너를 원망하게 되어버려서. 끝까지 못나기만 해서 미안해.
사랑해, 아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