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의사

by Sunny

얼마 전 동네에 스케치 클럽 (sketch club)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쉬는 날에도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다 보니 삶의 다채로움이 점점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취미 활동을 찾아보던 중, 우연히 이 클럽을 발견하게 되었다.

호기롭게 아이패드 하나만 달랑 들고 웹사이트에 나온 주소를 찾아갔는데 처음에는 어디가 입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작은 간판이 달린 낡은 문을 두드리니 빗자루를 든 중년 아저씨가 문을 열어주시며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셨다. 어서 오라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신 그분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다시 청소를 하시러 복도로 쏜살같이 사라지셨다. 문 앞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난감했던 나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스케치 클럽 로고가 그려진 종이를 발견했다. 그 로고 밑에는 위를 향한 화살표 하나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었고 나는 그 화살표를 따라 삐그덕 거리는 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그 계단 끝에서 날 맞이한 것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멋진 다락방이었다.

높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하게 방 안을 비추고 있었고 벽에는 온통 아이들의 미술 작품이 걸려있었다. 천장에는 온갖 밧줄과 조금은 뜬금없는 커다란 배 모형까지 떠 있었는데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것 같은 들뜬 기분에 나는 한참 동안 앉지도 않고 다락방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오신 50-60대처럼 보이는 중장년분들이 모여 수다를 나누고 계셨는데 대부분 나를 보시고선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 문을 열어주신 분이 왜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나 했는데 내가 그 회원층의 평균 나잇대에서 한참 벗어났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모두 다 각기 자리에 이젤을 펼쳐놓은 걸 보고 나도 무작정 이젤을 하나를 들고 맨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젤을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처음엔 난감했지만 남들과 비슷하게 펼쳐놓고 나서는 당당하게 내 아이패드를 거기에 걸쳐놓았다.



누군가가 우려낸 커피와 또 다른 누군가가 가져온 크래커를 조금씩 가져다 먹으면서 모델이 오기를 계속 기다렸다. 원래 시작 시간은 12시부터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1시 반이 되도록 모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안타깝게도 많은 회원분들이 짐을 싸고 돌아갔고, 어느새 이젤로 가득 찼던 방에는 나를 포함해 네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즈음 모더레이터 (moderator)분이 오시더니 모델이 12시에 취소를 해서 대타를 찾느라 늦어졌다고 양해를 구했다. 다른 누군가가 미술에 진심인 사람들만 남았다며 농담을 했지만, 사실 난 그저 시간이 남아도는 직장인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사과의 의미로 다음 회 무료 참가 쿠폰도 나눠주셨기에 생각지도 못한 득템에 기분도 좋아졌다.


두시 즈음이 되었을 때 팔다리가 아주 긴 여성분이 다락방으로 들어오셨다.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모델이 아니라 실제로 그림 모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순간 괜히 긴장이 되었다. 그녀는 빠르게 탈의한 채 얇은 가운 하나만 걸치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모더레이터의 말에 따라 가운을 벗고선 자리에 앉아 익숙하게 포즈를 취했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누군가의 나체를 보는 것은 묘한 경험이었다. 병동에 누워있는 환자를 볼 때에는 기계적으로 체크리스트를 채워나가듯이 관찰한다. 동공 크기, 빛 반사, 치아 상태, 심장 소리 등.. 이 환자를 직접 볼 수 없는 다른 이들이 내 기록으로 환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고 객관적이게 신체검사를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내 그림은 그렇지 않다. 물론 최대한 모델과 비슷하게 그리려고 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즐기는 마음이란 걸 잊지 않으려 한다. 비례가 틀어져도, 손가락 모양이 이상하더라도, 명암이 엉망이어도 결국엔 취미활동이기 때문에 그저 과정을 즐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3시간을 내리 앉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무얼 어떻게 그려내든 틀린 답은 없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내 왼쪽에는 오일 페인트로 뚝딱 그려내는 프랑스를 다녀오신 멋진 여성분도 계셨고, 오른쪽에는 오페라글라스 같은 걸 들고 정밀한 초상화를 그리는 남성분도 계셨다. 같은 장면을 각자 다른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그 신비한 경험이 계속 마음속에 맴돌았다. 그 커다란 다락방에서 네 명이서 조용히 그림만 그리던 하루가 앞으로도 계속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그 이후로는 다시금 일에 치여 사느라 그곳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지만 바쁜 연말이 끝나고 나면 다시 그 장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2026년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tempImage5TALkN.heic



작가의 이전글저는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