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를 돌이켜보면 세 가지가 떠오른다. 1994년, 마이클 조던, 그리고 록이라는 음악 장르. 1학년 때인 94년도가 통째로 떠오르는 건 유독 인상적인 사건/사고들이 연거푸 일어나서였다. 홍명보와 위르겐 클린스만을 각인시킨 미국 월드컵이 같은 해에 열렸고, 북한의 김일성도 그 해에 죽었다. 무엇보다 기록적이었던 폭염은 지금도 1994년이 뇌리에 엿가락처럼 늘어진 채 매달려 있는 실체적 이유다.
94년의 여름은 몸이 기억하는 여름이다. 교실의 책걸상은 불에 달군 듯 뜨거웠고 공기는 푹푹 쪘다. ‘가마솥더위’라는 말이 뜻 그대로 부합하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더위였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 해 여름 폭염일수는 31.4일로 평년의 3배였고, 열대야 일수는 17.7일로 평년의 3.5배였다. 전국 평균기온 역시 통계작성 이래 1위를 찍었다고 한다. 2018년이 되어서야 그 1위 자리를 내주게 되는 전대미문의 무더위 속에서 김일성의 사망과 월드컵 개최가 동시에 우릴 찾았다.
김일성이 세상을 떴다는 얘기는 처음엔 비현실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스마트폰 같은 건 존재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절. 유튜브도 10여년은 더 기다려야 지구촌 일상에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모든 것이 지금과 비슷하게 불분명한 시절이었다. 다만 그 불분명이 당시엔 정보의 한계 때문이었다면, 요즘은 정보의 과잉 때문이라는 게 차이다. TV를 보니 김일성은 정말 죽은 것이었고, 우린 당장에 통일이라도 될 듯 좋아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알다시피 한반도의 반쪽은 김일성의 아들과 손자에 걸쳐 기존 체제를 고수하며 지금도 남한과 불편한 긴장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복잡한 정치, 외교의 생리를 몰랐던 우린 그때만 해도 꽤 순진했다.
폭염과 함께 미국 월드컵도 안방으로 배달됐다. 그중 본선 첫 경기였던 스페인 전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봤던 기억이다. 홍명보의 패스를 받은 서정원이 후반 45분에 동점골을 터뜨렸을 때 떠나갈 듯 했던 교내 함성 소리가 엊그제 일인 것만 같다. 홍명보는 그림 같은 어시스트에 이어 본선 세 번째 경기에서도 독일 골문을 향해 중거리 슛을 때려 넣으며 94년 월드컵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반면, 두 번째 경기였던 볼리비아 전에서 차는 족족 골문을 벗어나(세간에선 그걸 ‘뻥 축구’라고 불렀다) 축구 팬들에게 아쉬움을 넘어 분노까지 일으킨 황선홍에겐 94년이 아마 자신의 축구 인생 중 가장 힘든 해였을 것이다. 황선홍은 독일 전에서 홍명보 이전에 겨우 골을 넣었지만, 볼리비아 전 부진의 여파였는지 썩 기뻐 보이지만은 않았다. 흥분과 열기로 가득했던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1994년을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 때문이다. 성수대교는 착공 2년 6개월 만인 1979년 10월 15일에 준공됐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다리는 거짓말처럼 내려앉았다. 성수대교의 붕괴는 부실공사와 관리 소홀, 다리 이용 차량대수의 급증이 원인으로 꼽혔다. 인재(人災)였던 것이다. 무려 32명의 생명을 앗아간 당시 비극을 나는 TV로 보았다. 사고 시간대가 등교 시간과 맞물렸던 때라 학교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했던 것 같다. 훗날 사회에서 만난 한 친구는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 교실에서 끊어진 다리 모습을 육안으로 보았다는 얘길 나에게 해주기도 했다. 가수 최백호는 ‘낭만에 대하여’가 실린 자신의 16번째 앨범 표지에 그때 국민 모두가 느꼈을 참담한 심정을 끊어진 다리 이미지와 아래의 글로 기록했다.
그 옛날 엿가락처럼 비틀린 철교도 손 붙들고 건넜건만 이젠 그저 뚝 하니 부러져 추락해버린 것은 다리가 아닌 우리네 강퍅한 가슴 쪼가리임에... 이어졌던 인연도 끊어지고 끊겼던 인연도 이어지며 살다가 그만, 내 삶의 중간이 끊어진 듯 휑한 가슴을 만져봅니다. 다리는 끊겼어도 다리보다 먼저이어야 할 우리네 가슴을 생각합니다. 오늘, 중년에 선 책임과 회한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하루에의 결심을 돋웁니다...
더 가슴 아픈 건 비현실적인 현실이었던 그 일이 이듬해 일어날 또 다른 대형 사고들의 슬픈 전조였다는 사실이다. 대구에서 가스가 폭발했고, 서울에선 백화점이 무너졌다. 내 고등학교 시절이 통과한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나에겐 지금도 상처와 상실의 세월로 남아 있다.
그맘때 나의 두 번째 키워드는 마이클 조던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조던과 농구에 빠져 살았다. 밖에서 농구를 할 수 없을 땐 우유팩을 공처럼 접어 쉬는 시간 교실에서 친구들과 했을 정도로 나는 농구를 좋아했다. 때마침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농구 만화 <슬램덩크>가 붐을 일으킨 때이기도 해, 내 맹렬했던 취미는 시대의 물결도 덩달아 탔다. 나는 키가 작아 골밑보단 주로 외곽에서 슛을 쐈는데, 멀리서 던진 공이 림으로 빨려 들어갈 때 쾌감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마이클 조던은 내가 고3이었던 1996년,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파이널 게임을 치르고 시카고 불스의 네 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이전 세 차례 우승은 중학교 때 지켜봤다. 불스는 내가 진고(진주고등학교)를 떠난 97, 98년에도 우승을 하며 조던을 농구의 전설로 만들었다. 그는 내가 10대에서 20대로 접어들 무렵,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을 맞을 때 자신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런 조던은 2025년인 지금도 NBA 역대 가장 위대한 선수(GOAT, Greatest Of All Time)로서 틈만 나면 회자되고 있다. 그는 분야를 떠나 90년대를 대표한 유일무이의 슈퍼스타였다. 조던은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농구팬들의 영웅이었다. 그는 재능도 타고났지만 노력도 남달랐다. 하루에 슛을 천 번 이상 던졌다는 조던의 이야기는 어린 나에게 많은 걸 느끼게 했다. Just Do It. 조던을 모델로 썼던 나이키의 ‘망설일 시간에 시작하라’는 슬로건은 결국 나의 좌우명이 됐다.
십대 때 내 마지막 키워드는 록 음악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록과 헤비메탈을 들었다. 그 전엔 가요와 팝 위주로 들었었다. 음악 취향이 바뀐 계기는 같은 반이었던 록 마니아 친구가 우연히 앨범 두 장을 추천해주면서였다. 바로 메탈리카의 5집 <Metallica>와 너바나의 2집 <Nevermind>였다(앞선 1994년은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해이기도 했다). 시원하고 헤비한 두 앨범을 듣고 나는 완전히 다른 음악 세계로 첫 발을 내디뎠다. 음악도 장르마다 들을 시기가 따로 있는 건지, 이전 같았으면 시끄럽고 과격하다고 거부했을 메탈리카와 너바나는 서태지의 ‘교실이데아’ 때 느낀 해방감과 자신감을 다른 차원에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 앨범들을 들은 뒤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다. 록 음악은 그렇게 운명처럼 내게 와 나의 운명이 되었다.
사람은 본인이 잘 하는 것과 좋아하는 걸 발견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 학교란 당연히 그걸 함께 발견해주는 곳이 되어야 하지만 ‘공부’를 지상과제로 삼는 우리 교육 제도에서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만약 고등학교 때 글쓰기에 재미를 느꼈다면, 실낱같이 내 안에 있었을 작가로서 재능을 알아보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다른 일로 헤매는 시간을 줄인 대신, 더 자연스럽고 안정되게 이 일에 안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이란 원래 그렇질 못해서 나는 결국 미래의 생업과 관련 없는 학문을 전공하게 된다. 사회복지였다. 어머니께선 당신의 아들이 ‘착하다’는 이유로 사회복지학과 진학을 바라셨는데, 나는 또 ‘착하게’ 어머니 뜻을 따랐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한국의 사회복지는 사람이 착한 것과는 딱히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사회복지도 나라 법치와 예산에 얽매인 엄격한 사회제도였을 뿐더러, 봉사 이전에 이익을 추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냉정한 사업이었다. 군 제대 후 남은 학업을 마치고 서울에서 1년 정도 전공 일을 하며 나는 그런 직업적 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2004년, 메탈리카와 너바나를 들었을 때부터 막연하게 뜻을 품어온 음악 글 쓰는 일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록 밴드 테슬라(일론 머스크의 테슬라와는 상관없다)의 앨범 <Into the Now>의 해설지를 의뢰받은 것이다. 과거 독자로서 보냈던 한 음악잡지 글을 좋게 봐준 해당 잡지 기자가 추천해준 일이었다. 테슬라 해설지는 내가 원고료를 받고 쓴 첫 글이다.
같은 해 온라인 음반몰로 직장을 옮긴 나는 회사가 병행했던 음악 콘텐츠 기자로 생활하며 취미가 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에겐 그래서 2004년이 음악 평론가로서의 원년(元年)이다. 그 뒤로 나는 한 번도 이 직업을 놓은 적이 없다. 다른 일과 함께 부업이었다, 온전히 이 일에만 몰입한 전업이었다 부침을 겪으며 이어져온 게 벌써 21년째다. 그리고 2025년 7월 현재, 나는 나를 록 음악의 세계로 안내해준 두 밴드의 평전과 연을 맺고 있다. 560페이지 분량인 메탈리카 평전 《메탈리카: 메탈 마스터》는 다 써서 세상에 나와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까지 소개됐고, 아직 제목을 정하지 않은 너바나 평전은 해외 원서와 인터넷 자료들을 중심으로 계속 취재 중이다. 너바나 책은 아마도 2027년 정도에 출간될 것 같다. 두 책 모두, 진주고등학교에서 친구를 통해 두 밴드를 만나지 못했다면 쓸 수 없었을 책들이다. 진고는 내 인생을 결정지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