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세대 케이팝의 세 번째 컴백 러시

by 김성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90년대는 비틀스의 60년대와 30년 거리다. 남진과 나훈아도 그 시대에 데뷔했다. 지금 우리가 사는 2020년대에서 1990년대가 딱 그만큼 거리에 있다. 90년대에 10~20대를 거친 사람들은 저 비틀스와 남진, 나훈아를 어르신들의 밴드요 가수로 여겼다. 30년은 어마어마한 세월이었던 것이다.


근래 90년대 댄스 그룹들이 무대에 서는 일이 잦다. 이들은 2000년대 중후반과 2010년대 중반에 컴백 러시를 감행한 바 있다. 나는 가수다, 히든싱어, 불후의 명곡, 슈가맨 등 방송 프로그램들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영화 ‘건축학개론’의 추억 탐험이 거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지금이 2020년대 중반이니 이들의 소리 없는 컴백은 거의 10년 단위로 이뤄져 온 셈이다. 영화 ‘라디오스타’에 나온 연예기획사 대표가 말한 대로 90년대 댄스그룹에는 아직 수요가 있다. 이들 존재는 40~50대 엑스 세대에겐 젊음의 증거였고, 저들의 활동은 엑스 세대가 아직 ‘늙지 않았다’는 보증이었다. 따라서 1세대 아이돌 그룹의 컴백은 스타는 스타로서, 팬들은 팬으로서 자존감을 높이는 윈윈 이벤트에 가깝다.


14년 만의 완전체 무대로 건재를 과시한 1세대 케이팝 걸그룹 베이비복스.


지난 15일, H.O.T.의 토니 안이 개인 SNS 계정에 팀의 완전체 사진을 올리고 팬들에게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전했다. 24년 전 마지막 콘서트를 열고 해체한 이들은 17년 뒤 MBC ‘무한도전’에서 재결합하며 중년 팬들을 설레게 했다. 아직도 자신들을 원한다는 확신이 든 그룹은 이듬해 고척스카이돔에서 단독 콘서트까지 연다. 그렇게 6년이 흘렀고, 토니 안의 인사는 이들이 한 번 더 뭉치겠다는 신호였다. 때는 9월 6일과 7일, 장소는 서울월드컵경기장, 행사 이름은 ‘한터 음악 페스티벌’이었다. 하지만 현재 이 페스티벌은 현장 점검 과정에서 장소 변경을 결정, 티켓 전액 환불 뒤 향후 일자 및 장소, 출연진 재공지를 공지했다. 단 헤드라이너는 변함없이 H.O.T.일 거라고 이들은 강조했다. H.O.T.는 곧 다시 돌아온다.



90년대 댄스 아이돌의 컴백에는 1세대 걸그룹 베이비복스와 같은 세대 보이밴드 지오디도 합류한다. 무려 14년 만에 ‘2024 KBS 가요대축제’ 무대에 완전체로 올라 화제를 모았던 베이비복스는 오는 9월 26, 27일 서울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3년 전 ‘데뷔 23주년 공연’부터 매년 단독 콘서트를 열어온 지오디 역시 연말 서울, 부산 무대를 확정했다.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90년대 가요 팬들은 이젠 거의가 중고등학생 이상 자녀를 둔 ‘엄빠’가 됐음에도 마음만은 10대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걸 적극적인 티켓 구매로 보여주고 있다.

네 번째 앨범으로 돌아올 듀스(오른쪽)와 새 싱글로 돌아온 노이즈+알이에프(NR).


90년대 아이돌 그룹과 관련해 공연 컴백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건 음원(음반) 컴백이다. 먼저 댄스 랩 듀오 듀스다. 듀스는 90년대 중반까지 서태지와 아이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다 멤버 김성재의 죽음으로 와해됐다. 그러고 흐른 30년. 남은 멤버 이현도는 지난 수년간 지켜보며 학습한 AI 기술에 기대 듀스 4집을 발표하리라 최근 공언했다. 자연적으론 불가능한 친구 김성재의 목소리를 기존 듀스 음원에서 추출해 새 음악에 새기겠다는 얘기다. 이현도는 거칠고 펄떡였던 “듀스 표 뉴 잭 스윙”으로 기존 팬은 물론 듀스를 모르는 젊은 층까지 동시에 사로잡겠다는 각오다. 어쩌면 ‘케데헌’에 ‘나를 돌아봐’가 삽입된 지금이 적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실 우려스럽기도 한데, 듀스의 음악은 20대 초반 두 청년의 활극에 가까웠던 퍼포먼스가 어울려야만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기에 그렇다. 뮤직비디오에서도 AI를 활용해 김성재를 데려올 수는 있겠지만, 실제 김성재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반향을 일으킬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듀스의 부활은 반쪽 부활이 될 수도 있고, 한편으론 옛 모습 그대로 두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회의도 든다. 그럼에도 의문보단 반가움이 더 크리라는 결론을 이현도가 내린 것으로 보이니 일단 응원하고 싶다.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춘 어두운 시선을 걷어내고, 고인의 멋있는 모습을 반추하려는 친구의 밝은 의도는 지지받아야 옳겠다.


음악 컴백에 한 팀이 더 있다. 엔알(NR)이다. 다분히 1차원적인 이름으로, 노이즈(Noise)와 알이에프(R.ef)가 한 몸이 됐다는 뜻이다. 요즘 세대는 모를 순 있어도 ‘어제와 다른 오늘’과 ‘상상 속의 너’, ‘고요 속의 외침’과 ‘이별공식’을 모르는 엑스 세대는 없을 것이므로 두 팀의 결합은 그 자체 엑스 세대에겐 뉴스거리다. 다만 모든 멤버들이 모인 건 아니다. 노이즈에선 메인보컬 홍종구와 랩/안무를 맡았던 한상일이, 알이에프에선 메인 보컬 이성욱만 왔다. 엔알은 이 트리오 라인업으로 지난 2월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올라 대중의 반응을 살폈다. 4회 공연에 보인 4050 팬들의 관심도가 만족스러웠는지 이들은 음원 발매까지 확정한다. 여기엔 90년대를 풍미한 프로듀서 김창환이 힘을 실었다.


하드웨어는 기대감을 높였지만 소프트웨어는 아쉬웠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딱히 없었다.


대중음악은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소리(장르)를 갖게 마련인데, 김창환과 엔알 역시 잔 기교나 시대영합 따위 없는, ‘록카페와 나이트클럽’이 유행한 90년대 그 시절 하우스 그루브로 신곡 ‘왜 그래’와 노이즈의 셀프 리메이크 곡 ‘체념’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룹의 화제성과 곡 수준은 별개였으니, 익숙한 ‘체념’은 반갑기라도 했지만 낯선 ‘왜 그래’는 듣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아무리 레트로가 콘셉트일지언정 적정 레벨이라는 게 있는 법. 그 옛날 날아다니던 김창환의 감각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싶을 정도로 ‘왜 그래’는 저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스타와 팬이 함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훈훈하다. 생업에 치여 산다는 핑계로, 취향이 변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청춘을 쏟아부은 추억을 없던 과거로만 치부하는 건 내 젊은 시절을 부정하는 것일 수 있다. 90년대 아이돌 그룹들은 MZ와 알파 세대에겐 환호보단 학습의 대상일 테지만 엑스 세대에겐 변함없는 우상(idol)들이다. 2020년대 중반에 저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건 그러므로 젊음을 잊지 않은, 놓기 싫은 중년 팬덤의 호출 덕분이다. 언젠가 제임스 코든의 ‘카풀 가라오케’에서 2016년에 데뷔한 블랙핑크 멤버들이 1994년에 데뷔한 스파이스 걸스의 ‘Wannabe’를 신나게 합창했듯, 각자 세대를 망각 않고 상대 세대를 존중하며 공존할 때 대중음악 문화는 더 단단해지리라 믿는다. 90년대 가수, 그룹들이 더 많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상 케이팝 아이돌이 이룬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