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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밤을 닮은 재즈 '재즈 퓨전'

by 김성대

* 이 글은 지면 관계상 '축약 버전'으로 한국전력공사(KEPCO) 사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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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퓨전’의 실체나 개념은 다소 모호하다. 역사에선 1970년대부터 유행한 재즈 록을 재즈 퓨전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실감하는 재즈 퓨전은 장르의 벽이 완전히 허물어진 크로스오버 양상에 더 가깝다. 그 전면적인 음악 사이 교류를 통해 재즈가 이루려는 건 물론 해당 장르의 대중화다. 이제 재즈는 록과 펑크(Funk), 라틴 음악과 솔(Soul) 뿐 아니라 클래식, 국악, 힙합, 댄스, 일렉트로닉, 월드뮤직 등 그 무엇과도 섞여 다른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다. 전통의 정통성 대신 전통의 융통성을 생존 전략으로 택한 재즈는 그렇게 대중 친화적, 대중 취향의 음악으로 거듭 나려는 노력을 지난 수 십년을 지나 지금도 해나가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이나 빛과 소금은 그런 재즈 퓨전이 한국에 뿌리 내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국내 팬들이 목격한 첫 사례였다.


재즈, 록을 만나다


스윙이라는 대유행을 누리고 비밥이라는 혁신, 프리재즈라는 혁명을 겪은 뒤 다소 주춤했던 재즈가 60년대 후반 맞닥뜨린 첫 퓨전 대상은 바로 록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50년대 로큰롤, 로큰롤에 록(Rock)이라는 새 이름표를 달아준 밥 딜런과 그 록의 부흥을 이끈 비틀즈의 1960년대를 지나 재즈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어쿠스틱 악기들에 플러그를 꽂아 만든 70년작 [Bitches Brew]를 기점으로 자신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장르를 관통하는 전류를 미래로 받아들인 재즈는 그렇게 새 시대를 맞았고 당시 주류였던 록과 대등한 주류로서 여태껏 살아남았다. 기타리스트 래리 코리엘의 회상처럼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그러니까 팝과 컨트리가 크로스오버 하던 그 시절 재즈 역시 웨스 몽고메리와 밥 딜런, 존 콜트레인과 비틀즈, 마일스 데이비스와 롤링 스톤스를 두루 사랑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70년작 [Bitches Brew]는 흔히 '재즈 퓨전의 시발점'으로 간주된다.


재즈 퓨전의 시발점 ‘Bitches Brew’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 앨범 [Kind Of Blue]의 주인인 마일스 데이비스. 모던 재즈의 반복적 패턴에 질린 그는 결국 재즈 퓨전의 길까지 스스로 연다. 시작은 [In A Silent Way]였다. 마일스는 이 앨범에서 향후 대표 재즈 퓨전 밴드로 남을 웨더 리포트의 웨인 쇼터와 조 자비눌을 비롯해 존 맥러플린(기타), 칙 코리아(피아노), 허비 행콕(피아노), 데이브 홀랜드(베이스), 토니 윌리암스(드럼) 등 시쳇말로 ‘어벤저스급’ 라인업을 꾸려 재즈의 다음 운명을 이끌었다. 1969년.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길 에반스와 ‘재즈 기인’ 선 라가 신시사이저 같은 일렉트릭 악기들을 조금씩 사용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리고 1년 뒤 문제작 [Bitches Brew]가 나온다. 이견 없이 누구나가 ‘재즈 퓨전의 출발’이라 일컫는 바로 그 앨범이다. 하지만 재즈 퓨전의 시작은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는 27분에 이르는 타이틀 곡의 러닝 타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 [Bitches Brew]는 대중이 재즈에 주목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기 보단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위대한 뮤지션이 재즈의 다음 운명을 음악으로 점친 실험작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발매한 첫 해에 50만장이 팔렸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갸우뚱 할 일이다.


차라리 이 앨범이 역사적인 이유는 어쩌면 [In A Silent Way]와 굵게 겹치는 참여 뮤지션들의 면면 때문일지 모른다. 앞서 말한 웨더 리포트에 맞먹는 대중적 인기를 누린 리턴 투 포에버의 선장 칙 코리아(피아노), 마일스가 따로 곡까지 헌정한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의 존 맥러플린과 드러머 빌리 콥햄, 레이블 ECM의 간판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과 얼마 전 생을 마감한 게리 피콕(베이스)의 스탠다드 트리오를 같이 이끈 드러머 잭 디조넷이 이 작품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 록 밴드들, 예컨대 콜로세움과 시카고,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와 머더스 오브 인벤션은 이러한 ‘재즈 록’ 경향을 ‘록 재즈’로 되받아 머디 워터스와 지미 헨드릭스를 동경한 동시대 재즈 뮤지션들과 사실상 같은 길을 걸었다.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이 이끈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는 웨더 리포트와 쌍벽을 이룬 재즈 퓨전계의 보석이었다.


허비 행콕과 팻 메시니


허비 행콕. 마일스와 더불어 재즈 퓨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클래식과 펑키 하드밥을 넘나드는 그의 카멜레온 같은 음악 스타일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을 재즈 록에 담금질한 앨범 [Head Hunters]와 일렉트로 펑크, 힙합에 손을 뻗은 83년작 [Future Shock]를 통해 그야말로 ‘쇼킹’한 행보를 이어갔다. 그래미 수상 등 전기(Electric)를 받아들인 재즈 퓨전으로 가장 큰 혜택을 누린 그는 60년대 이후 키스 재럿, 칙 코리아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재즈 퓨전 건반에 허비 행콕이 앉았다면 재즈 퓨전 기타의 대중화는 팻 메시니의 몫이었다. 10대 때 비브라폰 연주자 게리 버튼과 협연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팻은 우리네 조동진과 어떤날, 김현철 같은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웨스 몽고메리의 [Smokin’ At The Half Note]를 자신의 인생 앨범으로 꼽는 그는 그룹으로 남긴 퓨전 명반 [Offramp]에서 신시사이저 기타의 소리 세계를 펼쳐내며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베이시스트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명성에 버금가는 명성을 떨친 팻 메시니는 존 스코필드와 알 디 메올라, 래리 칼튼과 리 릿나워, 마이크 스턴과 로벤 포드, 빌 프리셀과 프랭크 갬베일 같은 연주자들과 함께 반드시 기억하고 들어봐야 하는 재즈 퓨전의 아이콘이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을 일렉트릭 재즈로 버무린 'Chameleon'은 허비 행콕이 재즈 퓨전에 기여한 가장 뚜렷한 족적이다.


대중성과 마니아 성향을 동시에 갖춘 팻 메시니의 음악 스타일은 80~90년대 국내 (재즈)팝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더 쉽고 더 편안하게 ‘컨템포러리(스무드) 재즈’


허비 행콕과 팻 메시니가 재즈라는 밥상을 대중 앞에 차려준 건 사실이지만 밥을 떠먹을 수저를 드는 건 어디까지나 대중의 일이었다. 록과 손을 잡았던 재즈는 이제 팝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재즈와 록이 만난 이유가 단순함과 활력이었던 걸 감안하면 쉽고 편안한 팝으로 재즈가 눈을 돌린 건 차라리 필연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최근 BTS의 ‘핫100 1위’ 소식으로 더 유명해진 <빌보드>지는 33년 전인 1987년 스윙과 비밥 같은 과거 재즈를 ‘트래디셔널 재즈’로, 팝을 지향하는 이후 재즈를 ‘컨템포러리 재즈’라 부르기 시작했다. 스무드 재즈, 팝 재즈로도 일컫는 컨템포러리 재즈는 재즈의 교양적 세련됨은 취하되 그 복잡한 이론적 속내는 꺼려하는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중은 기꺼이 그 재즈를 소화하기 위해 수저를 들었다.


도회적 낭만과 밤의 운치를 머금은 컨템포러리 재즈는 그 가벼워 보이는 속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명반을 낳았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빌 위더스 커버곡 'Just The Two Of Us'를 남긴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Winelight]와 노래, 기타에 똑같이 통달한 재주꾼 조지 벤슨의 [Breezin’]이 있다. 물론 'Feels So Good'이라는 명곡을 수록한 척 멘지오니의 77년 작품도 당연히 거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척 멘지오니의 'Feels So Good'은 재즈 팬은 물론 팝 팬들도 듣는 순간 무릎을 칠 '초대박' 퓨전 곡이다.


그 외 퓨전을 통해 재즈를 대중화 시킨 존재로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 네이선 이스트(베이스), 밥 제임스(피아노), 하비 메이슨(드럼)이 뭉친 포플레이를 기억해야 하겠고 비슷한 성향의 옐로우자켓과 스파이로 자이라도 같은 영역 내 한 축이었음을 알면 좋겠다. 한 평론가가 “부드럽고 스마트한 재즈 록 퓨전”이라고 말한 스틸리 댄 역시 재즈 퓨전의 세계에 대중을 초대한 중요한 팀이었으며, 팀 이름 자체가 장르 이름 같은 재즈 펑크 소울(Jazz Funk Soul) 같은 밴드도 재즈 퓨전의 매력을 충실히 전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Breathless]라는 앨범을 1,200만장 이상 팔아낸 소프라노 색소포니스트 케니 지와 데뷔작 [Come Away With Me]로 2002년을 자신의 해로 만든 노라 존스 역시 컨템포러리 재즈라는 영역에서 다뤄지곤 하는데, 이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실제 케니 지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에서 감행한 자신의 즉흥 연주에 팻 메시니가 날린 일갈(“절뚝거리는 리듬, 헛소리, 짝퉁 블루스, 음도 맞지 않는 의미없는 즉흥연주” - 개리 기딘스 외 [재즈](까치) P.610)을 감당해야 했고 노라 존스의 재즈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블루스와 포크, 컨트리와 더불어 그녀의 팝 보컬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장르가 뭐 그리 대수일까. 대중이 원하는 건 그저 듣기 좋은 음악, 자신이 공감할 수 있고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 같은 음악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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