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봉준호
[Behind Time 1925 - 1953 a memory left at an alley]는 2003년 한영애가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이다. 포크와 블루스 사이에 싱어로서 정체성을 두었던 그는 1999년에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를 부른 것을 계기로 옛 트로트를 다시 대하게 되었고 급기야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즈음까지 불린 명곡들을 자신이 되부르는 데까지 이른다.
'외로운 가로등'도 그중 한 곡이다. 1939년에 황금심이 부른 이 곡은 5음계에 갇혀있던 그 시절 엔카 풍 유행가들과는 달리 블루스 냄새를 짙게 내뿜고 있었다. 조선 가요의 황금기를 알린 '타향살이', '짝사랑'으로 유명한 고복수와 부부 연을 맺기도 한 황금심은 이 노래에서 굵고 서글픈 바이브레이션을 힘껏 구사하며 자신이 17세 때 부른 '알뜰한 당신'과 조용히 결별했다.
기획사 뮤직웰이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과 더불어 해당 리메이크 앨범의 백미로 꼽은 이 '외로운 가로등'을 한영애는 자신만의 처연한 목소리에 서럽게 담궜다. 강기영(달파란), 방준석, 이병훈, 장민승, 장영규로 구성된 영화 음악 창작 공동체 복숭아가 입힌 스트링 어레인지와 재즈 편곡은 그런 한영애의 노래를 더 울렸고, 아래로 아래로 구슬픈 곡은 64년이라는 세월의 그늘에 모던이라는 한 줄기 빛을 떨구었다.
'외로운 가로등'은 작사가 이부풍(시인, 소설가로 활동한 박노홍의 필명)과 작곡가 전수린이 썼다. 이부풍은 1903년 문을 연 조선 요릿집 명월관을 지나다 그 앞에서 서성이던 여인의 사연을 듣고 영감을 얻어 노랫말을 지었다. 여인은 과거 가난한 애인의 학비를 대기 위해 화류계에서 일했는데 이후 검사가 된 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여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명월관은 바로 그 남자가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언뜻 임권택의 <티켓>과 드라마 <청춘의 덫> 줄거리 토막이 떠오르는 이야기다.
'외로운 가로등'은 가수 생활 28년 만에 한영애에게 첫 뮤직비디오였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2003년 10월 5일 오후 6시에 촬영이 시작된 이 뮤비를 연출한 사람은 봉준호. 정릉에 있는 사찰 경국사 인근 주택가에서 찍은 이 영상은 당시 봉준호에겐 두 번째 뮤직비디오였다. 그가 처음 지휘한 작품은 바로 3년 전 김돈규가 부른 발라드 '단(但)'. 주연은 박해일과 배두나였다. 배두나는 이 뮤직비디오를 찍은 그해 봉준호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 합류했고 박해일은 이 뮤직비디오를 찍은 이듬해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출연한 뒤 박찬옥의 <질투는 나의 힘>을 거쳐 이정욱의 <국화꽃 향기>,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만났다. '외로운 가로등' 뮤직비디오는 바로 그 <살인의 추억> 촬영을 끝내고 그 스태프들 그대로 이틀 만에 촬영한 것이었다.
봉준호가 잡은 콘셉트는 이부풍이 들은 여인의 사연 대신 노래의 상징인 '가로등'에 방점을 찍는다. 도심 속 외진 오르막길을 비추던 가로등은 등장 남자 배우들에 의해 꺼지거나 깨지거나 하며 영상의 중심에 선다. 주인공은 다름아닌 류승범과 강혜정. 류승범은 형(류승완)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해 이 뮤직비디오를 거쳐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 이를 터였다. 물론 강혜정은 이 뮤비를 찍은 그해 박찬욱의 <올드보이>에 출연했다.
한국 영화사를 바꾼 <살인의 추억> 미장센이 그대로 적용된 뮤직비디오엔 두 주인공을 뺀 커플 10쌍이 등장해 키스를 나누는데(봉준호는 이를 "키스하는 남자들의 퍼레이드"라고 자평했다), 때문에 컷이 많고 디졸브 처리도 잦다. 특히 "70년대 쌈마이 영화"를 찍는 것처럼 신나게 작업했다는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에서 백광호 역을 맡은 박노식과 조용구 역을 소화한 김뢰하를 깜짝 출연시켜 유머를 더했다. 여기서 김뢰하는 파상풍을 앓던 조용구의 옷까지 똑같이 입은 채 등장했고 박노식은 캐릭터들 중 유일하게 인간이 아닌 시베리안 허스키를 상대로 짧게 열연(?)했다.
"해진 저녁부터 다음날 동틀 때까지 풀가동"을 해 찍은 '외로운 가로등' 뮤직비디오를 두고 봉준호는 100회 이상 촬영 분량을 감당해야 하는 영화와 달리 "시작하려니 끝나버린" 작업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글은 '단디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