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종의 탄생
바야흐로 퓨전과 크로스오버의 시대다. 무엇이든 섞어야 통하고 섞여야 공감 받을 수 있는 시대를 지금 우린 살고 있다. 이는 비단 의식주 분야에서 뿐 아니라 문화 예술 쪽에서도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감지되고 있는 경향으로, 전통 음악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가령 재즈와 일렉트로닉이 우리네 전통음악을 만나고 팝과 트로트가 국악과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은 이미 대중에게도 익숙한 장르 트렌드다. 아울러 케이팝이 이끄는 '보는 음악',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정재일로 대표되는 '듣는 영상'이라는 공감각적 시도는 이제 전통이 과거를 넘어 현재, 나아가 미래의 가치까지 진지하게 챙겨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방금 얘기한 소리의 시각화(보는 음악)와 이미지의 청각화(듣는 영상)는 단순한 음악 장르의 배합 또는 서로 다른 장르와 장르(예컨대 음악과 춤, 영화와 음악)간 동시다발적 표현에 기반한 것으로, 작금 전통음악이 이끄는 융복합 트렌드와는 조금 다른 궤를 갖는다. 그러니까 국악과 대중음악, 현대무용을 섞어 팝의 대안(Alternative Pop)을 제시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나 쇤베르크의 음악을 그림으로 들려준 칸딘스키, 그림 속에 재즈를 숨겨둔 몬드리안의 경우는 모두 소리의 시각화, 시각의 청각화 차원에서 가장 단편적이고 기본적인 전제만 건드린 사례인 것이다. 이와 달리 지금 글쓴이가 짚어보려는 건 장르의 조합을 통한 좀 더 창의적인 결과물들이다. 무슨 말이냐면 여러 예술 장르들이 한자리에 모이되 이 장르가 저 장르에 영감을 건네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이 잉태되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을 포착해 이미지와 사운드가 순환, 증폭하는 지금의 예술 경향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즉 "아름다운 음악의 악보는 보는 순간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말한 히사이시 조의 추상적인 감탄 대신 '한국의 소리'를 듣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소리를 재현한 백순실 화가의 구체적인 의지를 이 글은 지향한다.
"한국의 전통미술과 음악이 시대적 동기화를 이루는 프로젝트"인 창작 국악 그룹 그림(The林)이 전시한 '블랙 무드(Black Mood) – 여백의 반영'은 그런 면에서 꽤 적절한 예가 될 것 같다. '그림'은 자신들의 전시를 가리켜 이 시대 음악인과 과거의 화공 사이 의식의 유사성 및 그 이면을 찾아가는 여정을 우리 전통음악에 실어 21세기 영상 기술에 담아낸 것으로 소개했다. '블랙 무드'는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는데, 핵심 기조는 조선 수묵화 너머에 담긴 서사와 한국화의 기법 내지는 정서가 음악으로 재해석 되었다는 데 있다. 금방이라도 그림을 뚫고 나올 듯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우리의 대금/해금/가야금과 서양의 건반/베이스로 들려주는 '반영'을 비롯해 현재(玄齋) 심사정의 '선유도'는 '노니는 물'로,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는 서도소리 중 '초로인생'으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편지'로, 안견 '몽유도원도'는 '낙원의 시'로 저마다 그림에 담긴 소리의 내막을 캐냈다.
소리는 그림을 들려주고 그림은 소리를 보여주는 이러한 예술 트렌드를 국내에선 2010년 정도부터 '융복합 예술'이라 불렀다. 융복합 예술은 근원(源)이 여러 개(多)라는 뜻으로 '다원예술'로도 불렸다. 하나의 감각이 아닌 여러 개 감각이 개입하는 이 포스트모던적 개념은 빛과 그림, 소리와 공간, 영상과 오브제, 춤 등이 서로를 견제하며 서로를 탐하는 창작의 시너지를 한자리에서 보려는 대중의 의지였기도 하다. 한 전문가는 "과학기술과 산업의 융합, 문화와 산업의 융합으로 창조경제를 만든다"는 지난 정부의 핵심 기조에 따른 콘텐츠를 엮어 새로운 사업으로 만들어 내는 그 시절 세계 비즈니스 추세와도 맞아떨어진 덕에 융복합 예술이 주목받을 수 있었다고 보기도 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융복합 예술은 더 정밀해지고 더 대중화되었다. 이는 예술 장르 간 교류와 융합이 한계가 아닌 새로운 해석과 시도를 통한 확장으로 이어지면서 보다 긍정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8년에 나온 '소리의 시각화'라는 책의 부제("비트의 펜으로 화음을 채색하다")가 마냥 현학적인 수사로 머물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다 그런 융복합 예술의 공급자와 수요자 측의 열정, 니즈가 알맞게 균형을 이룬 덕분이다.
건축물을 통해 덕수궁의 파란만장 역사를 되돌아본다는 콘셉트를 내건 '덕수궁 프로젝트'는 2012년에 첫선을 보였다. 그리고 지난해 이 프로젝트는 500년 도심화 과정을 모두 간직한 '정원'으로서 덕수궁을 통해 과거와 지금을 바라보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취지로 '상상의 정원'을 열었다. 현대미술가와 조경가 등 여러 분야/세대 작가 9팀이 참여한 이 전시는 증강현실을 활용한 미디어아트와 궁중 공예의 정수로 꼽히는 채화(彩華)가 공존하며 이 글의 주제인 융복합 예술 콘텐츠의 바탕을 다졌다. 여기에 전통음악가도 가세했으니 바로 크로스오버 밴드 잠비나이의 해금 연주자 김보미다. 김보미는 조경가 김아연의 작품 '가든카펫'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고종의 가족사진에 있던 카펫을 정원이라는 형식으로 바깥에 끄집어낸 이 작품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인공과 생명 등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고 충돌하는 하이브리드적 창작물로 김아연의 설명에 따르면 "감상하는 오브젝트가 아닌, 깔린 카펫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바닥"에 가까운 무엇이다. 이 웅장한 작품에 김보미는 그에 어울리는 경건함, 고독감을 덧씌워 무용가 아이반의 안무와 영상에서 만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그려냈다.
이질적인 예술 장르가 협업해 국악의 매력을 드러내는 "장소맞춤형" 공연 시리즈인 'The ART SPOT' 역시 융복합 예술 트렌드의 주목할 만한 사례다. 기획 공연 '정조와 햄릿'은 그중 하나로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를 향한 원망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정조와 햄릿이 음악감독 '상자루'의 현대적 전통음악을 배경으로 한 무대에서 만나는 작품이다.
그 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원주 '뮤지엄 산'에서 2020년 첫 공연을 치른 '공간이 만든 공간' 역시 인문학 강연과 전통음악 공연의 접목이라는 예술의 융복합 가능성을 증명했고, 활거문고로 독보적 영역을 개척한 박우재와 영국 BBC, 가디언이 주목한 생황 연주자 박지하가 300평 공간에서 펼친 '그대로 보기'도 예술의 일탈이 어떤 식으로 예술의 연장이 되는지 보여준 소중한 시도다.
'소리산책'은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미디어아트와 전자음악을 전공한 권병준 작가가 시각 장치 및 악기를 통해 관람자의 공감각적 작품 감상을 돕는 사운드 아트다. '소리'를 '산책'한다는 제목에서 이미 다차원의 장르 교배를 예고하는 이 전시는 '어린이를 위한 입체 음향관'을 비롯해 국악기인 편경의 음계를 모티프로 한 '풍경 그리고 풍경', 스피커 설치 작품 '공중정원', 체험형 작품인 '노래의 손짓', 헤드폰을 쓰고 미술관 건물 밖을 걸으며 소리를 듣는 '오묘한 진리의 숲 4 - 다문화 가정의 자장가' 등으로 융복합 예술의 진수를 선보였다.
폴란드 출신 디자이너 코르넬리아 야스빌레크와 콜렉티브 그룹 '야세오(JaSeo)'로 활동 중인 서성협은 공간과 디자인, 설치 미술 등으로 디자인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찰하는 "의미 생산자"다. 가야금 연주자 박경소의 독주회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무대를 기획했던 그는 다른 매체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감각을 뒤섞는 방법을 '위상학적'이라고 전제, 그 방법론에서 파생되는 감각을 '위상감각'으로 규정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2'에 출연한 박다울(거문고)이 참여한 '위상감각을 위한 퍼포먼스'는 순수성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순수와 순종을 위해 제거된 다양한 가능성을 복원, 재연해 기존 체제 및 사고방식에 질문을 던진 소리 전시다.
앞서 소개한 김보미는 잠비나이의 동료인 거문고 연주자 심은용과 함께 또 다른 작품에도 소리를 더했는데, 바로 설치미술가 김명범의 '원'이다. '원'은 거대한 사슴 머리에 뿔 대신 울창한 나뭇가지를 얹은 조형물로, 동물이 죽어 땅에 스며들고 땅에서 나무가 자라 다시 동물 삶의 연장을 돕는다는 "순환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음악의 메인 테마를 이끈 심은용은 사슴의 슬프고 순수한 눈망울에서 인간의 감정을 느꼈고, 해금으로 스치듯 분위기를 만들어간 김보미는 사슴과 나무의 이질적인 만남을 코드 변화로 표현했다. 김보미는 이러한 자신들의 작업을 단순한 기록과 전달을 넘은 '재창작' 차원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김보미의 말은 정확히 이 글의 주제와도 통한다. 결국 눈으로 보는 음악과 귀로 듣는 이미지라는 것은 예술과 예술, 장르와 장르가 돌고 돌아 새로운 창작의 세계에 안착하면서 파생되는 공감각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기록과 전달, 감상은 그다음 문제다.
*이 글은 '월간 공진단'에 편집 버전으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