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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pr 07. 2022

이오공이 제출한 21세기 뽕짝 논문

250 [뽕]

250이 4년 동안 연구한 '뽕'의 결실. 초판 2천 장이 금세 동이 났다고 한다. 


뽕짝(이하 '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싫어하지도 않은 걸 보면 그냥 관심이 없었다는 게 맞겠다. 뽕은 내 취향이 아니었고 그래서 나는 뽕을 듣기 위해 지갑을 연 적이 없다. 나에게 뽕은 그저 아줌마/아저씨,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취한 술 더 취하고 싶을 때, 무자비한 세상 속 시름을 걷어차고 싶을 때 장소 불문 습관적으로 트는 배경 음악이었을 뿐이다.


그랬던 내가 뽕을 다시 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10대 때 어머니 따라 친척 잔칫집엘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그 악명 높은 '관광버스 춤'을 실제 목격한 것이다. 봉준호가 '마더'의 끝 무렵에 배치한 그 충격적인 시퀀스가 현실에서 눈 앞에 펼쳐진 것인데, 나는 그때 평생 잊혀지지 않을 문화 충격을 받았다.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벅찬 버스 통로를 무대로 제자리에서 상하 반동에 몸을 맡긴 중노년들. 엄청난 속도(bpm)와 음압으로 무장한 전자 비트에 투신한 그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초현실적 무아지경, 초자아의 엑스터시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빠르고 정신사나운 분위기에 이상한 슬픔 같은 게 배어 있었던 것이다. 수 십 명이 자발적으로 몸을 불사르는 음악에 알게 모르게 들러붙은 슬픔이 신난다는 건 또한 변태적이었다. 사나운 비트 위에 뿌리내린 멜랑콜리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도 저들이 감당해온 삶의 피로에서 비롯된 것인 듯 하다. 즉 남들보다 '빠르게'와 '잘나게'를 삶의 절대 가치로 놓고 달려온 세대의 집단적 좌절감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음악으로는 도무지 치유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짐작하는 것이다. 아, 뽕이 그토록 빠르고 슬펐던 게 개발을 명분으로 현대 한국인 다수가 겪어온 '비교와 차별'의 멍에를 벗어던지기 위한 용트림이었을지도 모른다니. 그날 '관광버스 나이트클럽'을 터뜨릴 듯 울어준 뽕은 그래서 당신들에겐 삶의 연장을 위한 배터리였을 테고, 불행과 고난으로 얼룩진 삶의 그늘을 걷어내줄 한 줄기 햇살이었을 게다.


나는 음악 장르에도 계급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아니라고는 하지만 클래식, 재즈를 듣는 사람과 아이돌, 트로트를 듣는 사람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벽이 있다. 사람들은 상대의 취향을 존중한다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취향을 깔보거나 배제하기 십상이다. 그런 개인들 뇌리에 잠복해있는 은근한 계급 의식이 단 하나 장르에 떼로 덤비는 경우도 있으니, 그게 바로 뽕이다.



뽕은 한국 대중음악의 천덕꾸러기다. 고급스런 표현과 개념 정리를 추구하는 학자들은 서로 눈치 보며 그저 언젠가는 풀어야할 숙제로서만 뽕을 바라보고, 직접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재미 차원에서 한 번 건드려보는 메뉴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건 '뽕끼'라는 비슷한 정서를 가진 트로트 가수들조차 뽕을 무시하는 모습(사실 '뽕짝'이라는 말 자체가 트로트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을 종종 보여준다는 것이다. 가사도 리듬도, 무엇보다 그 춤이 가볍고 천하다는 것이리라. 일제 시대부터 일구어온 고고한 계보가 있기에 정통부터 네오까지 트로트 가수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보기에 뽕은 그래봤자 누더기 마냥 짜집기한 메들리이고 맥락도 없이 흔들어제끼는 디스코일 뿐이다. 


평론계는 더하다. 이땅에 대중음악 평론이라는 것이 자리매김한 그 순간부터 뽕이라는 장르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봐도 무방하다. 권위와 현학에 물들었던 이른바 '1세대' 평론가들이 뽕의 대부 이박사를 다시 바라본 것도 해외(일본)에서 대접을 받아서였지, 한국에서 이박사 재조명이 저들의 자발적 재발견에 기댄 건 아니었다. 70년대 프로테스트 포크의 가치와 조용필, 들국화의 의미 따지기에 바빴을 그들에게 첫 박이 '뽕'이고 다음 박이 '짝'이라는 2박자 의성어를 두 팔 걷고 해부해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렇듯 뽕은 무대에서도 평단에서도 내 편 네 편 없이 오랜 기간 한국 대중음악계의 애물단지였고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작 뽕의 에너지를 그토록 간절히 원한 건 대중음악의 토대인 '대중'이었음에도 말이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250(스스로는 '리오공'이라 쓰고 있지만 여기선 편의상 '이오공'이라 읽는다)은 12년 이상 활동해온 프로듀서 겸 디제이다. 그는 자신을 "댄스 음악 만드는 사람"으로 늘 소개한다. 있지(ITZY), 보아, NCT 127 등 유명 케이팝 아이콘들과 작업해온 250은 자신의 소속사 래퍼들(그가 있는 BANA에선 이센스, 빈지노, XXX 등이 한솥밥을 먹는다) 앨범에도 꾸준히 참여하며 커리어를 닦았다. 그런 그가 뽕에 집착하기 시작한 건 4년 여 전. 학술적으로도 술자리 잡담에서도 명확히 진단되지 않은(어쩌면 영원히 진단될 수 없을) 뽕에 대한 나름의 음악 보고서, 논문 같은 것을 그는 쓰려 하고 있었다. 물론 하루키 소설의 구절 마냥 거기에 "형이상학적 의문이나 도덕적 갈등" 따윈 없었다. 다만 현재 50대 이상 서민과 중노년 층의 알 수 없는 애환과 환희, 그것을 뭉뚱그려 토해내는 음악 장르에의 뜨거운 호기심만 있었을 뿐. '뽕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일상의 뽕적인 것들을 발굴, 수집하러 다니는 과정을 찍은 '뽕을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는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랬다. 미국 볼티모어 사운드 DJ 겸 프로듀서 로드 리(Rod Lee)의 'Dance My Pain Away'를 듣고 "위험하게 사는 사람들의 댄스 음악"이라는 역설에 흥미를 느낀 그가 '슬프게 사는 사람들의 댄스 음악'인 뽕에 빠져든 건 차라리 필연처럼 보였다. 뽕을 "슬프면서 조금 웃긴 무엇"이라고 정의내린 그는 "이박사는 무조건 제낄 것"이란 무모한 생각으로 장르에 덤벼들어 이박사로부터 벗어나는 데만 2년을 보냈다. 그는 그렇게 철학자가 사유에 빠져 허공을 바라보다 깨달음을 얻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뽕'에 대한 치열한 사색을 4년간이나 해나갔다. 5부작 다큐멘터리 '뽕을 찾아서'는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트뤼포가 히치콕을, 글렌 굴드가 바흐를 탐닉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었다.


250은 한때 최대한 어렵고 복잡하게, 사람들이 으레 할 수 있는 생각들은 피하면서 자신만의 멋있는 뽕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결국 다 엉터리라는 걸 깨달았다. 이박사의 '서울깜박이'를 레퍼런스로 삼은 '뱅버스'처럼 자고로 뽕짝이란 쉽고 한 번에 가야 하는 장르였기 때문이다. '사랑이야기'에서 이박사가 주문하듯 뽕은 결국 내가 "좋아서" 해야 하는 음악이었다. 싸움 나지 않게 "네 거 내 거 찾지 말고 확 질러"야 진정한 뽕이 나온다고 이박사는 가르치는 것이다. 뽕은 폼을 잡는 음악이 아니다. "신나서 하는" 음악이다.


포마드 바른 말쑥한 헤어와 진지한 눈빛, 쫙 붙는 갈색 터틀넥. 온라인에서 먼저 공개된 앨범 '뽕' 속 250의 모습은 그 자체 70년대 뽕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네


그리고 데뷔작 소개글은 이게 전부다. 이 짦은 문장은 그대로 앨범의 첫 곡 제목으로 쓰인다. 곡 '모든 것이 꿈이었네'는 '뽕을 찾아서' 4부에서 잠깐 소개된 이박사의 오랜 동료 김수일의 자작곡을 250이 프로듀싱한 것이다. 250은 채집하듯 김수일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고 옆에서 흐르던 설거지 물소리까지 녹음해와 자신의 데뷔작 첫 곡의 핵심 소스로 삼았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고전을 샘플링 한 '나는 너를 사랑해'와 더불어 앨범에서 가장 이질적인 운치를 가진 이 곡에서 앞을 볼 수 없는 김수일의 깊은 회한은 서글픈 전자 올겐과 느린 전자 비트에 실려 세월과 함께 부서진다. 



250은 앨범을 만들면서 그 노래를 담고 싶은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 목적 안에서 가장 오래 갈 수 있는 아이디어를 늘 생각했다. 또한 트렌드를 멀리 하면서도 완전히 등지지는 않는 융통성도 염두에 뒀다. 이 소박한 창작의 원칙 안에서 신중현과 현인이 유령처럼 나타나고 "작고 허접한 클랩 하나도 사람을 빨아들일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준 제이 딜라(J Dilla)의 유산이 빛을 발한다. '드럼 톤만은 멋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박사와 저스티스(Justice)의 동승으로 이어진 '사랑이야기'도, 술집 한 귀퉁이에서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들이 뽐냈던 젓가락 장단을 닮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리듬도 다 거기에서 나왔다. 또 하나. 1982년도에 태어난 남자(250 자신을 말한다)의 노스탤지어를 그는 이 앨범에 꼭 반영하고 싶어했는데, 이는 양인자(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쓴 그 작사가다)가 시를 쓰고 '아기 공룡 둘리'를 부른 오승원이 마이크를 잡은 '휘날레'에서 더 이상은 없을 '어른이의 동심'으로 멋지게 실현됐다.


250은 "뽕은 나의 뼈"라고 말했다. '뼈'라는 말은 뿌리이고 기반이고 중심이란 얘기다. 그는 그런 각오로 앨범 '뽕'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다. 한국 사람들에겐 지겨울지 몰라도 외국인들에겐 여전히 새로운 무엇으로 다가갈 거란 믿음으로 250은 그렇게 4년 여를 달리고 달려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기어이 얻어냈다. 이 결과물에 영국 음악 매체 와이어는 "장르의 키치를 현대적 터치"로 빚어냈다는 평가를 던졌다. 그리고 '뽕'은 평론가 짐 해링튼이 디앤절로(D'Angelo)의 'Brown Sugar'를 두고 했던 말처럼 "혁신적으로 복고적"이었다. 


슬프지만 춤을 춰야 하는 정서. 250이 찾아낸 얼터너티브 네오 뽕의 실체란 결국 '명랑한 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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