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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pr 04. 2023

'기적'이 아닌 '시작'의 빌보드, 피프티피프티

피프티 피프티는 EP 한 장(왼쪽), 싱글 한 장으로 데뷔 4개월 만에 빌보드 핫100 차트에 올랐다.


소설에서든 드라마/영화에서든 처음부터 다 가지고 다 이룬 캐릭터엔 관심이 잘 안 가는 법이다. 사람들은 보통 역경에 처해 그 역경을 딛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인물에 더 호감을 느낀다. 아이돌 그룹 피프티피프티(이하 '피프티')도 그런 경우다. 물론 아직 역경이라기에도 그 역경을 딛었다기에도 말하기 뭣한 4개월이 지났을 뿐이지만, 소속사(어트랙트)와 이들은 어쨌거나 그 사이 '빌보드 핫100 진입'이라는 큰 열매를 거둔 상태다. 지금 피프티가 주목받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중소기획사 출신 아이돌 그룹이, 그것도 데뷔 4개월 만에 메이저 중의 메이저라는 빌보드 싱글 차트 100위 안에 들어간 것이다. 이전까지 진입 최단 기록이었던 뉴진스의 6개월에서 두 달을 앞당긴 일이고 원더걸스, BTS, 블랙핑크, 뉴진스에 이은 해당 차트 내 다섯 번째 쾌거다. 피프티는 내친김에 영국 오피셜 차트 싱글 톱100에서도 96위를 차지하며 파죽지세를 이어나갔다.


지금 피프티 관련 국내 기사들에 '중소의 기적', '중소의 혁명' 같은 제목이 붙는 건 그래서다. 세계 팝 시장의 양대 산맥인 미국과 영국에서 톱100에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성적과 기록에 유난히 민감한 우리 사회에서 최소 자본으로 최대 결과물을 이끌어 낸 경제학적 성취는 언젠가부터 사회 구성원 만인이 공유하고 축복해야 할 경사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단기간 기록 하나로 기적이니 혁명이니 하는 초조한 표현들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이는 벌써부터 "여자 BTS가 되는 게 목표"라고 말하는 어트랙트 전홍준 대표의 말에서도 전해지듯 조금 빠른 진단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다 떠나서 일단 대형기획과 중소기획이라는 계층적 구분부터가 애처로울뿐더러 그 구분으로 파생, 고착화되는 무명에 대한 편견, 나아가 무명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빈약한 추정에까지 치달을 수 있을 거란 사실이 나는 가장 우려된다. 성적과 기록이라는 결과주의가 거기까지 이르는데 걸린 과정을 깡그리 매몰시킬 때 우린 자칫 몸통 없는 사지를 허우적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 당연히 '좋은 음악'이다. 여기서 좋은 음악이란 작사/곡, 프로덕션, 가창력, 랩, 안무를 모두 포함한다. 전 대표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듯 보인다. 예컨대 피프티의 성공을 위한 조건 중 1순위로 "듣기 좋은 음악"을 꼽는 그는 데뷔 EP에 넣을  네 곡을 고르기 위해 무려 300곡을 모니터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대표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엄선한 곡들을 한 번만 들어봐 달라며 미국 현지 레이블들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발품도 팔았다. 프로모션 비용 부족을 감안하고서라도 선택한 이 콘텐츠 지향적 강단은 애초 제작자가 음악의 질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면 실행으로 옮길 수 없었을 일이다(전 대표가 애초 스포티파이 순위에만 집착한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피프티는 지난해 11월 데뷔 미니앨범으로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였음에도 한국에선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본 존재로 남고 결국 해를 넘겼다. 그리고 터진 건 새로 맞은 해 2월 말 내놓은 싱글 'Cupid'에 대한 해외의 반응이었다. 구체적으론 전 세계 하이틴층이 즐겨 쓰는 숏폼 비디오 플랫폼 틱톡(TikTok) 챌린지를 통해 피프티는 관심과 지명도라는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것이다. 지금 당장 유튜브로 가 'Cupid'를 검색해 보라. 1331만 회 이상 조회수에 언어도 다양한 2만 3천 여 댓글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해외 팬들은 하나같이 이들의 보컬 화음과 랩, 곡의 콘셉트와 안무 같은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중소니 대형이니 하는 경계는 그들에겐 관심 사항이 아니다. 당연히 전 대표가 피프티 데뷔작을 지인의 녹음실에서 만든 뒤 차를 팔고 식사도 저렴한 것만 한다는 사연도 그들에겐 논외에 가까워 보인다. 단순한 얘기다. 음악 팬들은 그저 좋은 음악에 반응할 뿐이다. 백예린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하고 성숙한 아란의 목소리. 혹자는 'Cupid'에 떠도는 듣기 좋고 기분 좋은 시티팝 바이브와 미니멀한 디스코의 활기가 자칫 커피숍, 라운지용으로만 소비될까 우려하기도 했다. 쉽고 친근하다는 건 한 발만 삐끗하면 밋밋함이라는 절벽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이 "놀라울 정도의 단순함"은 피프티의 앞날에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작금 'Cupid'에 관한 해외 리뷰의 비슷한 논조다. 팝 같은데 알고 보니 케이팝이더라, 라는 말장난 같은 감탄에 피프티 측이 더 깊이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그나마 나는 피프티 멤버들이 음악가로서 뚜렷한 각자 취향과 목표, 구체적인 방법론을 얘기하고 있다는 데서 팀의 밝은 미래를 본다. 가령 리드 보컬인 아란은 딘과 크러쉬를 연구하며 자신의 길을 닦고 있고 메인 보컬인 시오는 예바(Yebba)를 본보기로 삼아 자신의 약점을 줄여나가고 있다. 리더 겸 서브 래퍼인 새나는 들으면 대번에 알 수 있는 이하이의 목소리를 흠모하며, 메인 래퍼인 키나는 노래와 랩을 자신의 색깔로 엮어낼 줄 아는 도자 캣(Doja Cat)을 비롯해 국내에선 비비와 김하온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는다. 여기서 그치면 바람으로만 남겠지만 이들에겐 나름의 계획도 있다. 가령 키나는 피프티 앨범을 위해 본인이 직접 가사와 프로듀싱을 만지는 미래를 그리고 있고, 아란은 이미 알앤비 곡을 몇 개 만들어둔 상태다. 여러 악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시오는 특히 일렉트릭 기타로 곡을 쓰는 것이 목표이며, 메인 댄서인 새나는 멤버별 자작곡은 물론 그룹 안무를 직접 짜보는 일을 꿈꾸고 있다. 시오는 멤버들의 이 모든 바람을 종합해 "진정성 있는 아티스트, 음악이 좋은 그룹"을 자신들의 예술적 청사진으로 요약했다.



팀 이름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는 50대 50의 확률, 즉 '반반'이라는 뜻이다. 쫄깃한 긴장감과 절박한 기대감이 공존하는 이 이름엔 이상과 현실에 반씩 걸친 존재라는 뜻도 있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중소기획사(현실) 출신 아이돌로서 빌보드 핫100(이상)에 오른 지금 상황과 팀명은 그래서 약속처럼 어울린다. 이 모든 화제의 중심에 선 곡 'Cupid'는 큐피드의 화살을 갈망하는 수동적 객체에서 큐피드를 버리며 능동적 주체로 탈바꿈하는 소녀들의 프리퀄이다. 이들이 설정한 확률의 '반반'은 앞으로 전개될 본편에서 어디로 기울지가 결정 날 것이다. 지금 피프티에게 빌보드는 종착역이 아닌 출발역이다. 진짜 기적은 그 과정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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