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Aug 29. 2023

관철하는 삶의 아름다움

이 글은 <월간 에세이>에도 실렸습니다.


지난 6월 첫 주말에 공연 두 편을 보았다. 하나는 재즈 기타 공연, 하나는 통기타 포크 공연이었다. 바니 케슬과 정태춘.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스윙 재즈 기타의 거장 바니 케슬을 돌아보는 기타리스트 탁경주와 그의 트리오 공연은 전주에 있는 더바인홀이라는 곳에서 나를 초청해줘 해설자 겸으로 참석한 자리였다. 그리고 정태춘, 박은옥의 공연은 산청군 성심원이 개최한 제9회 '성심어울림축제'에 초대받아 보고 온 무대였다. 나는 두 공연을 보며 자신이 하려는 바를 관철시키는 삶, 그 삶의 힘과 아름다움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바니 케슬은 그걸 60여 년 세월 동안 추구하다 2004년에 눈을 감았고, 정태춘은 1978년부터 40여 년간 그걸 해오고 있는 사람이었다. 살다 간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열정은 결국 무대에서 같은 가치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1923년 10월 17일, 흑인과 백인 구역 사이 마을인 오클라호마 주 머스코지에서 태어난 바니 케슬은 열두 살에 기타를 잡고 열 네 살에 프로로 데뷔한 천재형 예술가였다. 일렉트릭 기타의 선구자인 찰리 크리스천을 만나 기타 연주에 눈을 뜬 그는 찰리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열아홉 살 때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프로 연주자로서 승승장구한다. 베니 굿맨과 아티 쇼 같은 스윙 재즈의 거물들과 협연은 물론 엘비스 프레슬리, 비치 보이스 같은 로큰롤 스타들과도 접촉하며 그는 잘 나가는 '퍼스트 콜' 세션 기타리스트로 명성을 떨쳤다.


그날 더바인홀에서 탁경주 트리오는 그런 바니 케슬이 1968년 런던에서 녹음한 앨범 [Swinging Easy!]를 재해석해 들려주었다. 탁경주의 말에 따르면 저 앨범은 스윙 기타리스트로서 케슬의 예술적 고집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영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연주자들을 만나 '너희가 무슨 재즈를 알겠어. 내가 한 수 가르쳐 주마' 하는 심정으로 녹음했을 거라고 한다. 실제 케슬은 평단으로부터 코드 기반 멜로디 지식에서 타의 추종을 허락지 않은, 거칠게 스윙하면서도 깔끔한 사운드를 위해 연주를 다듬어온 인물 정도로 평가받는데 탁경주의 말은 그 부분을 언급한 것으로 나에겐 들렸다. 실제 브라질의 느슨한 보사노바도 바니 케슬의 완고한 기타를 만나면 스윙 재즈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은 그날 탁경주 트리오가 들려준 연주의 진실, 백미이기도 했다.



이튿날 경남 산청에서 만난 정태춘도 바니 케슬 못지않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고수해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삶일 수도 있다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가수로, 풍경을 묘사하는 그림인지 마음을 담는 일기인지 모를 가사와 노래를 헤세와 쇼펜하우어의 그늘 아래에서 송창식, 레너드 코언의 자장을 흡수해 "자기 당대의 윤리와 정의를 붙잡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바쳐왔다. 누군가에겐 '촛불' 부른 이로서, 다른 누군가에겐 음반 사전 검열을 깨부순 제도 바깥의 투사로 기억될 그는 고독에 기반한 해부학적 묘사와 약자들의 억눌림을 기록한 르포 기사 같은 노랫말을 쓰며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으로 지난 40 년을 살았다. 억세게도 맑았던 그날 산청에서 박은옥은 그런 남편과 자신을 '신나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사실 그건 그들의 예술가로서 정체성이기도 했다.


이틀 동안 다른 장르의 두 거인을 만난 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내가 하려는 바를 하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단순한 인생의 성패 문제가 아니다.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이고 그것을 지켜내는 문제이다. 내 결론은 이랬다. '자기만족이 아닌 타인의 만족을 의식하는 삶은 뜻도 진심도 관철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저들은 진정한 자기만족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행복, 진짜 '나의 삶'을 누린 사람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9월 극장에서 만나는 서태지와 아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