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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Jun 15. 2023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름 노래

잔나비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 그대는 또 어떤 마음이었길래 / 그 모든 걸 갖고도 돌아서 버렸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와 함께 밴드 잔나비를 대표하는 곡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이하 '여름밤')의 시작은 "그대"와 "그때"라는 말로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가 '과거의 우리' 것임을 예고한다. 이미 이 곡은 헤어진 사람들의 노래이고 그래서 슬픈 노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안타까움과 슬픔보다 곡 제목의 "뜨거운 여름밤"에 주목하고 싶다. 이별 뒤 남은 자의 가슴 아픈 사연을 읊은 노래는 어느 계절에든 불릴 수 있고 실제 수도 없이 불려 왔지만 이상하게 이 "뜨거운 여름밤"이라는 전제는 어감에서부터 뭔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뜨거운 열대야를 견뎌내기에도 바쁜 여름밤, 주인공은 지금 뜨거운 눈물까지 감당해야 할 지경에 놓였다. 견고했던 사랑이 모조리 무너져버린 뒤 펼쳐진 이 서러운 부조리의 한복판에서 이제 남은 것이라곤 "볼품없는" 것들 투성이다. 이 잔인하지만 아름다운 상황 설정은 잔나비 음악에 거의 모든 노랫말을 짓는 최정훈의 감성(또는 철학)에 기댄 것으로, 이와 관련해 나는 2021년 발매한 이들 3집 리뷰에서 이렇게 썼다.


"작곡, 프로듀싱을 겸하는 보컬리스트 최정훈의 가사와 음색은 반론의 여지없는 잔나비 음악의 심장이다. 최정훈은 긍정과 화합을 바탕으로 환상과 상상, 삶의 순간, 사람과 사랑, 사회와 시대 군상을 문어체/구어체, 하오체/해요체 구분 않고 노랫말에 실어낸다. "읽기 쉬운 마음"이나 "미소 위로 닻을 내리고", "촌스러운 은유를 벗겨내는 고통" 같은 문학적 수사는 그런 작사가로서 최정훈의 장기 중 일부일 뿐이다. 그는 가사를 쓸 때 확신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멜로디와 편곡에 따라 작사한다는 그는 그저 자기와의 대화를 통해 걸러진 언어를 글로 옮길 뿐이다. 혼자만이 아는 그 내면의 독백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고, 그들의 정서적 지지가 결국 지금의 잔나비를 있게 했다."


'여름밤'도 그런 최정훈의 가사가 지닌 독보적 정서에 기반한 노래다. "다짐은, 세워 올린 모래성은 / 심술이 또 터지면 무너지겠지만"같은 가사가 중요한 곡이다 보니 도입부 역시 노래하며 들어간다. 이후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이라는 밴드 사운드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고 식었던 팝 멜로디가 따뜻하게 데워지고 나면 음악은 어느새 드넓은 스트링 벌판에서 깃발처럼 휘날린다. 가사의 서사, 보컬의 화음, 절제된 연주, 과감한 편곡. 데뷔 전 버스킹 밴드로 잔뼈가 굵은 잔나비의 그러한 음악 좌표는 기본적으로 먼 과거를 향해 있다. 무슨 얘기냐면 이들이 영향받은 곳은 3호선 버터플라이나 마룬 파이브, 콜드플레이가 울타리 친 현대식 농장이 아닌 산울림과 비틀스, 퀸과 비치 보이스가 개간한 오래된 농지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들은 그래서 "세간에서 통용되는 '밴드'라는 수식어도 굳이 옛 정겨운 '그룹사운드'로 대체해" 그 멀고도 먼 60~70년대라는 활주로에 자신들의 음악적 정체성을 착륙시킨다. '여름밤'이 수록된 잔나비의 데뷔작 'Monkey Hotel'을 두고 최정훈이 "비틀스를 뜨겁게 공부한 뒤 만들었다" 밝힌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름밤' 공연 이벤트로  팬에게 받은 사연을 노랫말에 옮긴 것이었다. 김도형(기타) 언젠가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만든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절교했던 모친과 모친 친구의 관계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일을 뿌듯해했다. 이렇듯 영화도 미술도 음악도  작품이 실화일  위로와 감동은 배가된다. 어릴  부모의 이혼으로 입은 상처를 음악으로 표현한 켈리 클락슨의 'Because Of You', 앞을   없는 스티비 원더가 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Isn't She Lovely' 모두 그랬다. 철학자 베르그송이 말한 대로 특정 시간에 어디선가  풍경을 다시는 보지 못할 빛깔들로 화폭에 고정시키는 화가들처럼, 온전히 자신만이 차지했기에 결코 반복되지 않을 영혼의 순간을 시로 읊는 시인들처럼, 예술이란 그래서 "언제나 개인적인 무엇을 지향"하는 것일지 모른다.


"록을 완전히 뒤집을 필요 없이, 살짝만 비틀어도 재창조할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준 1980년의 록 밴드 크램스(The Cramps) 마냥 잔나비 역시 그렇게 자신들이 심취한 레트로 음악을 "살짝만 비틀어" 한국 대중음악계 뉴트로의 중심에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디의 방식으로 메이저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어" 나갔다. 방금 당신과 나는 그 잔나비와 최정훈이 남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름 노래 한 곡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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