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필모그래피의 전환점이 된 '부당거래' 이후 류승완 감독은 범죄, 시대, 역사물을 꾸준히 건드려 왔다. 전작인 '모가디슈'처럼 실화에 바탕한 신작 '밀수'는 그중 범죄와 시대에 다리를 걸칠 것으로 보인다. 예고편과 배우들을 보니 류승완 영화의 감초 격인 오락, 액션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가미 된 것 같은데 이는 "정감과 호쾌함, 액션과 감정의 물길을 막힘없이 뚫다"라는 영화평론가 김소미의 한 줄 평만 봐도 알 수 있다.
공개된 영화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군천이라는 바닷가 마을에 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해녀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다. 이때 바다에 던진 물건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밀수 세계를 알게 된 해녀 출신 '승부사' 조춘자(김혜수)가 '해녀들의 리더' 엄진숙(염정아)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위험한 일이지만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에 뛰어든 진숙은 '전국구 밀수왕' 권필삼(조인성)을 만나 본격적으로 밀수판에 발을 들인다. "던지고 건지고 속여라"라는 홍보 문구가 말해주듯 그렇게 영화에선 일확천금의 기회를 두고 사람 사이 음모와 배신이 펼쳐질 모양이다.
류승완의 부친은 영화와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들을 좋아해 당대 스타들 팸플릿 사진까지 따로 모았을 정도였다고. 어린 류승완은 TV '명화극장'에서 영화를 소개해준 정영일 평론가의 해설에 당신의 해석을 첨부하시던 아버지와 홍콩 무술영화를 보러 틈만 나면 조카를 극장에 데리고 다닌 삼촌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영화를 접했다. 류승완의 부친은 과거 경양식집도 운영했는데 음악을 선곡해 트는 디제이 역할도 병행했다 한다. '밀수'는 류승완의 부친이 한창 열심히 살던 7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70년대 중반은 73년생인 류승완이 아직 세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류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때 그 시절로 가장 빨리 안내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고 했다. 아예 각본 집필 단계에서 음악들에 어울리는 장면을 상상했을 정도였다 하니, '밀수'는 영화와 음악의 세계를 산 교육으로 알려준 부친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작품에 가깝다.
대중음악에 한정했을 때 대한민국의 70년대는 통기타 포크와 그룹사운드의 시대였다. 그 젊음, 열정을 감안했을 때 대학생과 청년의 시대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70년대엔 또한 제1회 MBC대학가요제와 TBC 해변가요제가 열렸고 이장희의 '그건 너'와 어니언스의 '편지', 김세환의 '사랑하는 마음', 송창식의 '고래사냥' 등이 널리 사랑받기도 했다. 멀뚱한 구어체로 독특한 창법을 구사한 배철수의 활주로가 출연한 것도 같은 시대의 일이다. 사회정치적으론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 전대미문의 해프닝이 벌어졌고, 한국 연예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대마초 파동이 일어난 것도 바로 그 70년대였다.
그러니까 류승완은 자신이 코흘리개 시절을 보낸 저 시대 대중음악을 들으며 '밀수' 시나리오를 썼다는 얘기다. 알려진 대로라면 시나리오에는 실제 영화에 쓰일 음악이 미리 선곡돼 있었다고 하는데 거기엔 '앵두'와 '연안부두', '님아'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포함됐다. '앵두'는 기성세대에겐 '오동잎'으로 더 기억될 검은 나비 출신의 트로트 고고(당시 그룹사운드 출신 가수들이 부른 '록 트로트' 성향 노래들을 가리킨 장르 아닌 장르) 가수 최헌의 또 다른 대표곡이고, '연안부두'는 한국 재즈의 선구자라 일컫는 김영순의 삼 남매(김파, 김단, 김선)가 결성한 테크니션 그룹 김트리오의 대표곡이다(같은 70년대에 활동한 김대환, 조용필, 최이철의 김 트리오와는 동명이'팀'이다). 그리고 '님아'는 한국 록/솔의 대부 신중현이 발굴한 펄 시스터즈가 '커피 한 잔'과 더불어 남긴 시대의 명곡이며,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당시로선 파격적이었을 6분대 길이에 첫 가사가 무려 3분 20초대에 나오는 산울림의 대곡이다.
물론 저 곡들로 영화 전체를 채울 순 없다. 류승완은 음악감독을 물색했고 결국 장기하를 데려온다. 그간 헤비메탈 밴드 스트레인저와 멍키헤드 출신의 김동규('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영화 '올드보이'를 거친 최승현('다찌마와 리')과 조영욱('베를린'), 한재권('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 방준석('주먹이 운다', '베테랑', '군함도', '모가디슈') 등과 작업한 류승완이 이미 대중음악계에서 입지를 쌓은 프로 음악가를 섭외한 이유는 장기하가 "70년대 음악에 진심"이었기 때문이다(대중음악가로서 류승완 사단에 합류한 건 앞서 말한 김동규와 유앤미 블루 출신 방준석 이후 장기하가 세 번째다).
어릴 때 서태지를 동경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든 첫 자작곡은 랩 듀오 크리스 크로스를 흉내 낸 것이었지만 장기하의 음악 뿌리는 류 감독이 알고 있는대로 언제나 70~80년대 음악이었다. 특히 산울림과 송골매를 자신의 머릿속 "두 기둥"이라고 한 그에게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김창완(산울림)이었다. 나머지 반쪽인 배철수(송골매)는 장기하가 "한국어로 노래하는 사람들 중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서 늘 그의 가창 문법을 지배하고 있다. 단순히 스타일에서만이 아니다. 장기하는 지난 솔로 앨범 '공중부양'에도 저 두 사람에게 물려받은 파격성과 창법을 자기 식대로 반영하며 그 유산을 되새겼다. 세상이 그와 그의 음악을 일컬어 '오래된 미래'라고 한 이유다.
'밀수'는 그런 장기하가 영화와 맺은 두 번째 인연이다. 첫 번째는 윤종빈이 감독한 2012년작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였다. 장기하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밴드 '얼굴들'을 대동해 함중아와 양키스의 '풍문으로 들었소'를 다시 불러 영화를 빛냈다. 윤종빈은 '범죄와의 전쟁'이 어쩔 수 없이 나쁘게 살아야 했던 우리 모두의 아버지들 이야기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밀수'는 영화감독이 된 아들이 일찍 영화와 음악에 관심을 갖게 해준 아버지에게 바치는 영화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장기하는 두 영화 모두에 관여했다(그러고 보니 '범죄와의 전쟁'에서도 밀수는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단, '밀수'에선 주제곡만이 아닌 영화 전반을 책임지는 음악감독으로서다. 류승완은 사전 선곡된 노래들과 위화감이 없는 장기하의 자작곡들이 영화 속 "수중과 지상을 가득 채웠다"라고 만족해하며 음악감독 장기하의 역량을 인정했다.
가만 보면 장기하의 싱글 데뷔작 '싸구려 커피'와 류승완의 단편 데뷔작 '패싸움'은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전자에선 88만 원 세대의 눅눅한 자조가, 후자에선 88올림픽 세대의 절박한 활력이 느껴진다. 또 류승완은 성룡의 '취권'으로 홍콩영화에 입문했고 장기하는 랩과 내레이션의 중간 지대에서 노래를 취권 하듯 불렀다. 아직 '밀수'를 보진 못했지만 두 사람의 호흡은 아마도 '찰떡'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