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Oct 25. 2023

'인간같이'로 '인간가치'를 위협하는 AI작곡가의 역설


다른 예술계와 같이 음악 쪽도 인공지능(AI)의 거침없는 질주에 폭풍 전야다. 음악에서 기계와 인간의 공존은 이미 오래된 얘기이긴 하다. 예컨대 스튜디오 장비와 악기들의 진화, 전자음악이라는 장르가 구현한 미래 사운드의 청사진 등 음악이 가야 할 길은 인간과 기계가 그간 무리 없이 함께 제시해 왔다. 그리고 거기엔 늘 인간 중심의 창작이라는 불변의 전제가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그것도 많이 변했다.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작곡도 이제 더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상황은 이미 꽤 진행돼 있다. 가령 음악 이론을 몰라도 장르와 분위기, 길이, 레퍼런스만 선택하면 AI 작곡가가 이에 맞게 곡 하나를 수 십 초 안에 뚝딱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샘 스미스 음색으로 신나는 본 조비 풍 3분짜리 팝 메탈을 만들어 달라고 입력만 하면 작곡이 이뤄지는 것이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등 서양 고전 명인들의 6만여 곡을 포함한 수 백 년 인류의 음악 유산을 하룻밤에 학습해 내는 AI의 위엄이다. 이들은 한 사람이 200년을 투자해야 내놓을 수 있는 곡 분량을 8만 배 빨리 처리해 낸다. 적어도 생산력 면에서 인간 작곡가는 AI 작곡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퀸의 브라이언 메이가 "모든 것이 모호해지고 아주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어쩌면 2023년이 인간이 음악계를 지배한 마지막 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AI는 실연 악기도 직접 다루기 시작했다. 이미 드럼 같은 타악기나 건반 같은 멜로디 악기를 연주하는 로봇이 존재하고, 심지어 사람 폐를 흉내 낸 주름관으로 관악기까지 연주하는 기계도 있다. 속도에선 인간을 일찌감치 추월한 AI 연주자들이 감정 표현에서의 디테일, 그에 따른 연주의 진정성마저 확보한다면 이쪽 세계도 인간이 안심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가설이 아닌 진행형이다. 프랑스 작곡가 협회에 등록된 AI 작곡가 작품을 아비뇽 교향악단이 연주하고 AI 연주자가 인간과 재즈 즉흥 연주 대결을 펼치는, 더도 덜도 없는 순도 백 퍼센트 '실제 상황'이다.



일상적 과학 기술의 발전일 뿐인데 무슨 대수냐 되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파격적인 상황은 크게 보면 인간이 수 천년을 누려온 권위에의 도전이고 현실로 좁히면 해당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업 문제이기에 마냥 가벼이 여길 일은 아니다. AI가 하는 작곡은 인간의 것을 분석하고 조합한 모조일 뿐이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것'만을 인정해 주는 한국 저작권법이 사태의 경직성을 완화시키는 듯 보이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논리와 법으로 인간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리 간단하진 않다. AI 작곡가를 인간의 모방으로 보는 관점은 사람도 창작할 때 기존 예술가 및 작품들을 참고한다는 걸 간과하고 있어 헐겁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텍스트를 "인용들의 조직"이라고 했듯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들 수 없다는 건 인간이나 AI나 같다는 말이다. 국내 저작권법도 인간의 개입 없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멜로믹스(Melomics) 같은 진화 알고리즘 기반 AI 시스템이 계속 나오는 한 언제까지 '인간 작곡가' 편만 들어줄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AI 작곡가 뒤엔 그걸 개발한 또 다른 '인간'이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프랑스가 AI의 작품 저작권을 인정하고 시장에서 AI 작곡가 음악들이 저예산 영화나 게임에 자유롭게 배포되고 있는 현실은 그래서 강력하다. 국내 이세계아이돌, 일본의 하츠네 미쿠 같은 가상 아이돌들도 물 만난 고기처럼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을 보이고 있는 데다 AI 작곡가의 곡을 받아 데뷔한 하연 같은 가수의 존재도 위협적이긴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인간이 인간 작곡가들을 얼마나 더 보호해 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인간 입장에선 차라리 질문을 바꿔보면 어떨까. 사람이 만든 것도 다 못 듣는 판국에 굳이 우리가 왜 AI 작곡가가 만든 음악까지 들어야 하는가. 그럼 사람이 만든 건 AI가 만든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해답은 사람마다 가진 삶의 여정, 즉 '과정'에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AI가 대체할 수 없을 직업 다섯 가지 중 '인간끼리 커뮤니케이션'과 '스타'가 있다고 한다. 즉 인간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삶과 경험, 다수가 흠모하는 스타들의 인생만은 AI가 넘볼 수 없는 영역일 거란 뜻이다. 하긴 언론 기사와 소설, 영화 등을 통해 AI도 인간의 삶을 건조하게 학습할 순 있다. 하지만 그건 과정도 결론도 진짜가 아니다. 더구나 한 개인의 이야기를 AI가 완전히 알 수도 없을뿐더러 알아도 그건 AI의 것이 아니다. 학습한 인생을 인간은 인생이라고 보지 않는다.


계속 만드는 쪽 이야기만 했는데 인간이든 AI든 저들이 만든 음악을 듣는 건 결국 사람이다. 듣는 사람들이 없으면 이 모든 제도, 주장, 논리, 발전도 무용지물인 셈이다. 개인마다 판단과 취향이 제각각이라 단정 지을 순 없어도 AI의 창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음악은 인간의 영혼과 감정을 담은 예술 창작물이라는 판단은 이젠 '선입견'이다. 천재를 신과 같게 여긴 괴테식 천재론도 시대착오적이긴 마찬가지다. 대신 지금은 사람의 주관과 감정에서 음악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존 케이지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띠는 시대다. 인공지능 초상화가 5억 원에 팔리는 현재 AI 작곡가를 독자적 주체가 아닌 모방적 객체로 바라보려는 건 인간의 억지에 가깝다. 남은 방법은 하나, 받아들여 공생하는 것. 생산력에서 1억 곡이 넘는 대중음악을 만든 AI 작곡가를 인간이 이길 방법은 어차피 없으니 그냥 같이 가는 거다. 스매싱 펌킨스의 빌리 코건은 그래서 "젊은 예술가들이 AI 시스템을 활용해 더 나은 곡을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나처럼 지하실에서 1만 시간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며 AI의 불가피성을 진단했다. 비록 스팅은 이것이 인간과 AI 간 "전쟁의 시작"이라고 했지만, 또 아이스 큐브는 'AI 드레이크' 목소리를 만든 사람을 고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모쪼록 한쪽이 전멸할 거라는 이분법은 지양돼야 하겠다. 의료로봇이 발전한다고 사람의사가 사라지진 않는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아이, 로봇>이 보여주었듯 AI의 눈부신 발전은 종종 인간에게 불편과 불안, 때론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그늘에서 태어난 기술 발전이 역으로 인간을 그늘로 밀어 넣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을 넘어서는 과학 기술의 성취 내지는 폭주가 안고 있는 윤리의 문제는 결국 철학의 문제로 환원된다. 가령 스필버그가 영화 <A.I.>에서 던진 다음과 같은 질문이 그렇다. "로봇이 사랑을 하느냐보다 인간이 그런 로봇을 사랑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나는 작곡가들이 위기로 여기는 이 상황이 되레 '인간다움'이 무얼 해낼 수 있는지를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처럼'을 지상 가치로 여기는 AI가 작곡/연주로 이루려는 목표가 AI의 한계라는 건 참 흥미로운 역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6년 만의 몸풀기, 이효리 '후디에 반바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