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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Mar 06. 2024

"정지에서 재생으로" 대중음악가 윤도현

답보(踏步). '제자리걸음'이라는 뜻이다. 언뜻 제자리걸음은 사람이나 상황이 마냥 멈춰 있는 듯 보이게 한다. 하지만 사람과 상황은 분명히 걷고 있다. 그저 물리적으로 나아가지만 않고 있을 뿐이다. 음악으로 치면 답보란 재생되고 있는 음악을 잠시 정지해 둔(pause) 상태에 가깝다. 정지를 풀면 음악은 곧바로 다시 재생된다. 다시 재생된 음악은 정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고 힘차게 터져 나오듯 들린다. 제자리걸음도 걸음이다.


"'타잔'을 27년째 홍보하고 있습니다."

2년 전 늦겨울 보았던 YB 공연에서 윤도현은 반농담으로 말했다. '타잔'은 그가 94년 데뷔하면서 불렀던 노래로, 당시 패닉의 '달팽이'에 마음을 빼앗긴 대중은 '타잔'에게 덜어줄 마음을 소진한 상황이었다. 괜찮은 발라드 곡들이 같은 앨범에 있었지만 윤도현의 데뷔는 비교적 초라하게 마감됐다. 그러다 2년 뒤 영화 '정글스토리'에 주연으로 출연한 윤도현. 하지만 이번에도 스포트라이트는 영화 사운드트랙을 만든 故신해철에게 돌아갔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마음이었을까. 이듬해 윤도현은 밴드의 프런트맨으로 대중 앞에 선다. YB의 시작이다. 물론 상업적 결과는 데뷔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리지 좀 마' 같은 양질의 곡들이 소리 소문 없이 그대로 묻힌다. 윤도현은 답보 상태로 접어들었다.



YB는 이후 '먼 훗날', '박하사탕' 같은 곡들로 명맥을 유지하다 '한국 록 다시 부르기'라는 리메이크 앨범으로 약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 역시 대단한 관심으로까진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세기말이 지나 새 천년을 맞고 2년 후 마침내 '오 필승 코리아'가 터진다. 전례 없던 한일월드컵의 열기에 기름을 끼얹은 이 곡은 비록 통신사의 광고 음악이었고 그래서 윤도현에게 저작권도 없었지만 YB를 전 국민에게 알렸다. 이 인기는 YB를 2002년 북한 공연으로 이끌었고 다음 해 윤일상에게 받은 '잊을게'로 이효리의 '10 Minutes'에 맞설 수 있게 해 주었다. YB는 세계로 나갔다. 2009년 미국 '워프트투어' 록페스티벌 참가는 그 분기점이었다. 그리고 2021년 세계적인 록 밴드 메탈리카의 5집 헌정 앨범 'Blacklist'에 한국을 대표해 참여한 일은 그 절정이었다. 이 참여는 2013년작 'Reel Impulse' 이후 5년 가까운 정지(슬럼프)를 떨쳐낸, 윤도현과 YB의 가장 인상적인 '재생'으로 기록됐다.



추천곡



'가을 우체국 앞에서' (1994, 다음기획)




'타잔'이 아닌 이 곡을 데뷔곡으로 불렀다면 윤도현이라는 씨앗이 좀 더 일찍 싹을 틔울 수 있지 않았을까를 늘 생각한다. 무명 시절 호프집에서 "금붕어처럼" 남의 노래만 부르던 시절 우연히 만난 송라이터 김현성에게 받은 곡으로, 온기와 힘이라는 윤도현식 가창의 양축을 가장 아름답게 들려준다. 김현성은 '이등병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너를 보내고' (1999, 다음기획)




'너를 보내고'는 94년 '너를 보내고 II'로 윤도현의 데뷔작에 실렸던 노래다. 5년을 잠들어 있다 YB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한국 록 다시 부르기'에 다시 등장했을 때 이 노래는 원곡보다 더 거대하게 편곡돼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 '사랑 Two'와 더불어 왜 진즉 뜨지 못했을까 항상 의아한 발라드다. 개인적으로 노래방에서 자주 부른다.


'나는 나비' (2006, 다음기획)



윤도현은 YB를 대표하는 곡으로 '나는 나비'를 꼽는다. 가사를 보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데 애벌레와 번데기를 거쳐 화려한 나비가 되는 모습이 마치 지금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윤도현과 YB가 거쳐온 고난의 세월을 노래하는 듯 들리기 때문이다. 록밴드 YB의 음악적 진정성, 그 진정성이 대중의 귀에까지 전해지는 아름다운 풍경이 이 곡에서 펼쳐진다.


'흰수염고래' (2011, 다음기획)




이젠 YB의 대표곡이 된 노래. '나는 나비'와 비슷하게 힘든 세상을 헤쳐나가는 용기와 희망, 연대를 다룬다. 곡 전체를 통해 윤도현의 가창력이 충분히 발휘되고 있고 1절이 끝난 뒤 완전한 록 발라드로 거듭나는 부분이 곡의 은근한 매력이요 반전이다. 윤도현은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운 적이 있다고 했다. 아마 자신의 이야기 같아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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