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망한 날

by 규리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재치에 반했다.


한쪽 겨드랑이에 <씨네 21> 잡지를 끼고 나타나, 당시 쓰던 영화 시나리오 이야길 늘어놓던 사람. 같은 신문방송학도였던 사람. 글을 잘 쓰고, 별거 아닌 이야기도 세 배쯤 재밌게 만들어버리는 사람.


생김새는 다르지만 성격은 장항준 감독님을 떠올리게 한다

와인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 나눈 대화 한 번이 너무 즐거워, 당시 연락하던 사람과의 연을 정리하고 남편을 택했다. 외적으로나 나를 좋아하는 정도로나 그 사람이 조금 더 나았지만, 남편의 재치가 압승한 셈이다.


남편은 종종 자기 외모가 결정적이지 않았냐고 묻지만, 전혀. 내가 조건을 그다지 따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으음, 이건 말을 아끼는 편이 낫겠다.

아무튼 이십 대 중반에 만나 1년 만에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건, '이 사람과 살면 재밌겠네'란 생각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남편은 나를 자주 웃겨줬고, 안 맞아 싸우다가도 그의 유머 덕에 쉽게 화해한 날도 많았다.


그런데 이런 남편도 감기에 걸리면 지루한 남자가 돼 버린다.

감기에 걸린 남편과 최근 함께한 점심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나 혼자 떠드는데, 남편은 으레적인 대꾸만 하는 상태. 내가 말을 멈추면 침묵만 쌓이는 상태.


오빠,
지금 우리 대화가 소개팅 망한 사람들 같아


굳이 따지자면, 내가 더 마음이 있는 쪽인 소개팅인 듯 한데 상대가 무표정이니 나도 노력할 생각이 사라진 상태. 그러다 마음속으로 '집에 언제 가지?' 생각이 들고. 첫 만남이 이랬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살 붙여 살진 않을 텐데.


재미없어진 남편이 말했다.

"평소에 내가 너를 얼마나 재밌게 해 주고 살았는지 이제 알았지?"


점심을 먹고 각자 근무지로 헤어지며, 남편이 나를 배웅하다 한 마디 덧붙였다.


소개팅은 망했지만, 저녁에 집에서 봐


그 순간, 그는 '망한 소개팅남'이 아니게 됐다.

컨디션 난조로 점심 소개팅은 망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남자가 애프터를 신청하는 느낌. 괜히 조금 반가웠다. 심지어, 아주 잠깐이지만, 조금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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