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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 Oct 27. 2023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석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백 투더 퓨처>이자 <소울>이고, 동시에 이제까지의 하야오작 지브리 영화들을 기워 만든 담요 같은 영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유독 바다와 물을 독특하게 활용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바다는 생명의 기원이며, 도피처이고 깨달음을 얻는 장소다. 이번 영화에서는 벼랑 위의 포뇨에서 바다의 상징성과 파도를, 센과 치히로 속 부모님-부모님을 구하러 가는 자녀로 새 세대의 희망을, 붉은 돼지에서 아버지 인물을, 원령공주에서 자연과 생명을,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센과 치히로에서 환상 속으로 파고들며 현실을 등지는 대신 직시하고 나아가는 법을 가져왔다.

제목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라서 한바탕 꾸짖는 내용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보다는 영화 속 큰할아버지와 소년 모습으로 자신의 현재 모습과 과거 모습을 보여주며 나는 이러했는데 너희는 어떻게 살 거니? 하고 묻는 영화였다. 영화가 막막하고 무슨 메시지인지 알기 어려운 것은 이 탓이다. 왜냐면 우리는 정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니까.


이 영화는 자전적인 영화다. 그래서 두번째로 타임패러독스가 복잡하게 꼬여 있는 것이다. 영화는 두 갈래로 나누어서 보아야 하는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과거 소년 시절인 '마히토'이자 현재의 자신인 큰할아버지 모습인 자전적인 갈래와 그 위의 삶에 대한 텍스트다. 이를 '그대들', 후자는 '살 것인가'로 나눈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텍스트를 먼저 보기로 하자.



1.살 것인가

영화 속에서 저택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만나고,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만나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그들이 있는 세계는 기묘하고 아름답다. 마치 갈라파고스 섬을 닮았다. 환상으로 만들어낸 세계와 같다.


탑 안의 세계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여준 것처럼 아이를 위한 세계인 동시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이 내면의 성장을 이루어내야 했던 것과 같이 고여 있는 세계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백 투더 퓨처>인 동시에 <소울> 같은 경우다. 아직 태어나지 않는 사람과 같다. 큰할아버지를 제외한다면.


불의 소녀 '히미'는 와리와리들을 보호한다. 와리와리는 저편의 현실 세계,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저택 할머니는 살생이 금지된 죽은 자들을 위해 물고기를 죽이고 손질한다. 그는 이곳에 죽은 자들이 산 자보다 많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 세계에서 나가야만 한다. 언젠가 이 세계 바깥으로 나가 늙어야 하고 그가 온몸에 두르고 광휘처럼 능숙히 휘두르던 불에 휩싸여 죽어야만 한다.


그러나 삶은 그런 것이다. 불교에서 생과 노화를, 죽음과 병을 모두 고통으로 포함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들은 언젠가 태어나야만 한다. 와리와리와 다름이 없다. 이것에서 제외된 것은 동물들이다. 앵무새, 펠리켄, 그들은 힘을 가진 포식자처럼 보이나 주변부에 귀속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책무는 문 밖으로 태어나야 하는 것들을 밀어내는 것이다. 와리와리를 먹어치우던 펠리컨들처럼 앵무새는 히미와 마히토를 위기에 몰아넣어 바깥으로 내보낸다.


나츠코가 탑 안에서 아기를 낳았다면 앵무새들은 아기를 바깥으로 내보냈을 것이다. 비록 사람을 잡아먹긴 하지만 아기는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은 이곳이 거대한 산실이기 때문이다. 종이로 가득하던 산실은 이 탑 안의 세계를 축소해둔 것과 같다. 타인이 잡은 생선의 기름을 먹으며, 충분히 자라거든 비행해 밖으로 나가는 와리와리들의 태어남은 산실 안에 있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서 강과 바다, 물은 순환이며 생명이고 유예이다. 저승의 강을 닮은 이곳에서 물고기를 사냥하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는 유예된 자다.


유독 왜가리, 펠리컨, 앵무새를 필두로 새가 많이 나온 데에는 바로 이 이유가 있다. 새는 스스로 알 껍질을 깨고 나온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온 것처럼 새는 알 밖으로 나오며, 이것을 세계를 깨고 나온다고 표현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로 이것에 집중한다.

앵무새 대왕은 세계를 파괴한다. 다리를 칼로 끊고 히미를 납치하며 오만하고 욕심 사납게도 칼로 블록을 마구 썰어버린다. 이것은 그가 앵무새로서 가진 의무다. 실제 앵무새가 가진 파괴 본능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큰할아버지가 그를 말리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앵무새들은 알, 탑 안의 세계에서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 태어나면 그들은 그저 새가 된다. 처음 운석의 형태로 탑이 떨어졌을 때를 잘 생각해보면, 알의 형상에 가깝지 않은가.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후계 제안도, 블록을 하루에 하나씩 쌓으라는 제안도 듣지 않는다. 갈라파고스처럼 폐쇄적이며 얼마든 아름답게 통제할 수 있는 세계와 더럽고 추하며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의 세계 중에서 현실을 택한다. 이곳이 알이기 때문이다. 그는 태어나야 한다. 나츠코의 뱃속에 있는 아기처럼 그들은 이곳 밖으로 언젠가는 나가야만 한다.


성장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메시지다. 일어나. 힘들겠지만 일어나서 걸어. 네 이름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네가 왜 이 뭍 위에 있는지 생각해. 이것을 계속 되풀이한다. 센과 치히로의 모습으로, 아시타카와 산의 모습으로, 하울과 소피의 모습으로, 포뇨와 소스케의 모습으로.


'이세계물'이라는 것이 있다. 현재의 이세계물은 이세계로의 전이이고 정복을 목적으로 한다. 하야오의 이세계물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포뇨'에게는 이세계물이 이쪽 방향이 맞겠지만, 하여튼 그는 신기한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왕자는 다시 돌아와야 하고 부모님을 구하러 온 소녀는 기억을 잊더라도 현실로 돌아와 그토록 가기 싫던 이사를 마저 가야 한다.


2.그대들


영화는 전반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생을 다루고 있으므로 지브리의 대략적인 역사를 안다면 이해가 쉽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후계를 구하려고 했는데 마음에 두었던 젊은 후계자는 어린 나이에 죽고, 후계자로 데려온 아들과는 사이가 틀어졌으며 현재 후계를 구하지 못하고 은퇴 선언을 번복하였다는 배경 지식을 알아두면 좋다.

그러니까 이 배경 지식을 알고 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큰 할아버지인 것이 보인다. 나무 블록을 쌓고 또 쌓는 노인은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는 손녀 딸이 있는데, 불의 소녀 '히미'다.


'히미'는 불의 힘으로 균형을 찾는다. 펠리컨들이 미래에 아이들로 태어날 영혼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구한다. '히미'는 나츠코의 언니이고, 미래에 죽는다. 후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요절한 젊은 천재다.



큰 할아버지는 자신의 손자인 마히토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 악의 없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것을 권한다. 그러나 마히토는 이곳을 선택하지 않는다. 블록 역시 앵무새 대왕이 마구 쌓은 데다가 칼로 절단 내어 세계는 무너진다. 앵무새 대왕은 하야오의 실패인 동시에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세계는 무너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까지 자신이 지브리로서 달려온 세계에게 안녕을 고한 것이다. 이제 애니메이션 시장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살던 시대와 너무나도 달라졌다. 사람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하는 고어가 차지했거나, 전세계적으로 성인 대상으로도 판매가 원활한 편인 일본 시장을 벗어나면 아동용 애니메이션만 남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후세대에게 묻는 것이다. 내 뒤를 잇지 않아도 상관 없어. 제 2의 하야오 같은 게 나오지 않아도 좋아. 그렇지만 네가 왜 바깥의 세계로 나왔고 어떤 말들을 하고 싶은지, 네가 그토록 두려워 했던 앵무새들은 밖으로 나오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과 함께 생각해 봐.


그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중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이동진의 코멘트가 그렇게 달려 있다. '좋은 영화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현실과 맞닿을 수록 문제에는 명확한 답이 에이, 비, 씨, 소수점 떼고 22, 하는 식으로 제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평생 전쟁을 반대하며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영화 속에 나온 '아버지'처럼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장이었다. 이것에 대한 반항과 죄책감으로 살았던 그의 작품 세계와, 여전히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는 현시대에 대하여 비춘 것이 바로 무너지는 세계와 앵무새다.


그의 세계는 태어남의 세계다. 기괴하고 아름다운 세계다. '히미'는 하울과 소피를 닮았다. 적들에게 맞서 싸우던 하울을 닮았고 소피의 다정함을 닮았다. 이편의 세계는 포뇨 같기도 하고 원령공주같기도 하다. 다만 세계를 위협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전편과 달리 나오지 않는다.


이상은 무너지고 또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의 외침은 영화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의 외침은 밖으로 나오면, 관객들이 영화관 바깥으로 나오거든 큰 울림을 주는 존재감에서 무력하게도 작아져 비단앵무새로 변해버린다. 마법이 풀린 것이다. 실제로 바뀐 현실은 없다. 이것은 작품 세계의 끝이자 자기 반성이다.

그래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영화관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가 영화의 일부다. 문을 열고, 관객들이 줄지어 나가며 우리는 영화를 보는 마히토에서 앵무새로 변해버린다. 

영화는 결코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지브리식 문법에 맞춰 생각한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메시지가 보인다. 개인적으로도 이번 영화가 아주 크게 재미있던 영화는 아니었다. 다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서전 같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영웅담은 재미있어도 자서전까지 재미있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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