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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 Aug 03. 2022

[헤어질 결심 후기]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

본 후기에는 <헤어질 결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으로 온통 도포되어 있습니다.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


탈무드에서 말했던가요, 사람은 기침과 가난과 사랑을 숨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그야말로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 그 자체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번에도 이것을 '로맨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인터뷰에서¹ 박찬욱 감독은 '나는 항상 로맨스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번 영화의 경우 로맨스라는 장르적 요소가 다른 영화들에 비해 조금 더 전면에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박찬욱의 로맨스'라고 말한다면 이전작 <아가씨>, <박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어쩌면, 정말로 만약 혹시 어쩌면, 한 인물 개인의 그리 중요치 않은 로맨스가 있는) <친절한 금자 씨>등의 영화를 떠올렸습니다. 놀랍게도 로맨스 영화를 꾸준히 찍어오신 것입니다.

다만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영화 속에서 폭력과 주인공간의 정사가 빠진 이번 영화는 <박쥐>와 같이 명백한 형태로 묘사하는 대신 숨소리처럼 감정선을 묘사합니다. 오히려 전면이 아니라 영화 전체에 깔린 바닷물처럼 멀리 뒷걸음질 쳐 보아야만 이토록 거대했던가, 하고 관객이 깨닫도록 만드는 영화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무신경하게 회랑의 그림 앞을 스쳐지나간다면 이것을 아주 미적거리고나서야 끄트머리에 입맞춤 한 번 하고 마는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 가까이에서 보았다가 물러나 차츰 벽의 모습과 덧칠된 물감의 결과 캔버스의 규모 모두를 조합하여 본다면 몹시 치밀하게 만든 탓에 마침내 '숨소리마저' 신경 쓰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초반에는 거슬릴 정도로 숨소리가 큽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숨소리를 포착하였는가, 녹음을 했다면 아예 후시녹음으로 숨소리를 녹음까지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영화는 의문을 손에 쥐고 걸어가도록 안내합니다. 곧 영화는 이 숨소리는 '셜록 홈즈'와 같은 여타 추리수사물과 같이 '범행 장소에 있는 것처럼 공간과 범인을 상상하는 형사'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BBC 드라마 셜록이며, 연출을 좋아합니다)'의 '마인드 팰리스'와 같이 '숨소리+공간 구체화'정도의 수사 방법을 가진 형사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는 한 가지 식상하지만 향유자 모두가 매력을 느끼는 클래식한 로맨스 설정을 이끌어냅니다:바로 '오직 네 앞에서만 나는 내가 될 수 있어'입니다.


이게 대관절 무슨 소리입니까?


하고, 의문을 표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 생각이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보통 이쯤에서 다들 도망가시더라구요. 도망가지 마시고 마저 들어주시겠나요.) '해준'은 아내 '정안'에게 '살인사건이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습니다. 보통 형사 캐릭터에게는 클리셰적으로 따라붙는 설정입니다. 하다못해 (자꾸 언급하지만) 탐정 셜록마저 그렇습니다. 살인을 유희로 즐김이 명백한 고지능 소시오패스 셜록보다는 '해준'은 워커홀릭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형사'라는 직업과 일체화된 '해준'의 캐릭터성이야말로 '오직 네 앞에서만 나는 내가 될 수 있어'의 클리셰의 논점입니다.


진짜 무슨 소리를 하시나요. 하고 여전히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마저 들어주세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해준이 '형사 해준'과 '해준 개인'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끔 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서래'를 집으로 데려와 미결 사건 현장 사진을 가득 붙여둔 벽을 보여주고,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서래가 마치 형사 동료라도 되는 것처럼 털어놓고, 중국식 볶음밥(이라고 그가 주장하지만 턱도 없는듯한)을 요리해 대접하며, '서래'가 부엌에서 요리를 거들며 흡연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해준' 개인으로 잠을 청하는 식으로 양립하여 존재합니다. '해준' 개인으로는 이상할 '관찰 후 워치에 녹음 남기기, 망원경으로 들여다보기, 집 앞에 주차한 차에서 곯아떨어지기'는 '형사 해준'의 업무 역할이 되며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서래'는 그를 양립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반면 '정안'에게는 요리를 해주고 건강식품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얼버무립니다. 그들의 대화는 이상하게도 다소 일방적이며, '정안'은 이 대화에서 화자이고 '해준'은 청자처럼도 느껴집니다. 어, 으음, 하하, 뭐 그런 식으로 리액션을 하거나 묻는 말에 답을 하는 것이 꽤 많이 보입니다. 이포의 수산시장에서 산 생선을 해체하며 손에 피를 묻힐 때 전화를 대신 받아줄 것을 청하지만, '정안'은 '해준'이 '서래'에게 그랬듯이 혹은 '서래'가 그랬듯이 사건의 사진을 보지 않고 상세하고 잔혹한 사건 개요를 듣지 않습니다.


'불륜'은 무엇인가요? 여하튼 모르긴 몰라도 시작은 꽤 은밀한 법입니다. <헤어질 결심>에서 이것이 과연 허위매물이 아니고 진짜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한 순간은 바로 둘이 수사를 위해 마주하고 처음 마주 웃은 순간입니다. 저는 '해준'과 '서래'가 서로를 보고 웃을 때마다 제가 타자로 느껴졌습니다. 관객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푸르기도 하며 녹색처럼도 보이는 벽지가 덧발라진 넓은 저택을 헤매다 어느 문을 벌컥 열었더니 가만히 마주 보고 눈길을 주고받으며 웃는 두 사람을 목격하고 만 느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둘은 저를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얼굴에 가만히 떠오른 서로의 미소를 보기 위하여 너무도 집중해서 이 불청객은 안중에도 없겠지요. 둘은 공유할 수 없는 웃음 포인트가 존재하고, 제게는 이것이 인사이드 조크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 사랑의 시작이 '처음 둘이 피해자의 아내-형사로 마주하여 웃은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빠진 점을 묻는다면 해준은 '꼿꼿한 자세'를, 서래는 '품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짐승처럼도 살아보았던 서래가 동경한 점인 동시에 그가 진정으로 가지고 싶었던 태도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는 어딘가 비슷합니다, 꼿꼿한 자세-품위는 그리 멀찍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둘 모두 상대에게서 일정 부분 '나'를 보았고, 투영하였고, '내가 생각하는 상대'를 재생했고, 또 동시에 자신의 일부를 부러트리고 훼손하여 건네고 싶어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것이 닮았습니다. 꼿꼿하게 서 있던 형사로서의 자부심을 굴복하고 순응하듯 서래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 증거물을 건네고 떠나는 해준, 그런 모습을 보며 바다에 잠긴 서래. 여전히 사랑이 일정부분 자기애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이번 영화는 로맨스 영화'라는 단언이 옳았습니다. 이것은 순애가 맞습니다.... 솔직히 주변에서(*그리고 영화 개봉 전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는 로맨스 영화가 맞다고 할 때만 해도 또 벅벅 우기는 것으로 보아 허위매물일지도 몰라. 하고 생각했지만-저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로코로 홍보하는 것을 보고 가볍게 보았다가 아 맞긴 맞는데 이럴수가 사기 당하여 나온 사람입니다-이것은 무려 순애, 로맨스, 순정, 아무튼 그게 맞습니다. 이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로맨스 도식은 모두 들어간, 그러나 뻔하지 않은 로맨스 영화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고전적인 영화가 맞습니다. '나는 붕괴 되었다'고 말한 남자가 자신의 사랑을 부인하고 절규하며 상대를 비난하는 대신 힘빠진 목소리로 증거물은 바다 깊이 버리라고 말하는 영화는 고전적이기까지 합니다. '해준'은 자신의 사랑을 한때의 사랑놀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헤어질 결심을 하고 터덜터덜 집을 나가는 모습은 멋없기까지 합니다. 그게 좋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실연당하고 배신당한 비련의 남주인공에게 따로 어떤 장면을 할애하지 않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해준'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별로 새롭지 않은 모습을 보입니다. 다소 수동적이고, 식상하고, 아내 앞에서는 건조하고 시들시들한 모습입니다. 두 사람간 대화 주제는 주로 건강입니다. 섹스에도 건강과 관련한 내용이 따라붙고, 금연을 위한 음식에서부터 석류와 자라와 같은 뒷내용이 따라붙습니다. 그리고 이 대화 주제에는 이 주임이 아주 미세하게 꼬리표처럼 붙어 있습니다. '해준'은 '정안'과의 대화에서 다소 수동적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청자처럼도 들리고, 무언가를 크게 요구하거나 아내를 적극적으로 염려하지 않으며 먹고 싶다고 한 초밥은 엉뚱하게 다른 여자에게 사 줍니다. 아내가 폐경에 대해 이야기하며 석류를 손질할 때도 멀뚱멀뚱 앉아서 '생리 안 하면 좋은 것 아니냐'는, 무신경하게 들릴 법한 말이나 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해준'은 '서래'에게 문자하는 것을 보면 주책바가지라고 해도 좋을 법한 모습입니다. 무려 대신 일을 나가겠다는 제안까지 합니다. 미친 겁니다. 그리고 '서래'가 문자를 다 보낼 때까지 답장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서래'의 용건이 모두 끝나고나서야 답을 합니다.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원하는 것이겠지요.


'해준'과 같이 '정안'은 '이 주임'이라는 인물과 자주 통화를 합니다. 둘이 처음 식사를 할 때부터 저는 어렴풋이 '정안' 역시 마음이 건조하게 메마른 것이 아닌지, 그러나 부부라는 관계를 지켜나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이 관계를 이끌어나가고 노력하는 것은 '정안'입니다.


그런데 '이 주임', 여자 아니었던가요? 저는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늦은 시각, 사소한 용건으로 전화를 걸고 대화 중간에 튀어나오는 인물을 당연히 편협한 생각으로 동성의 연하 동료로 생각했기에 후반부 '정안'과 함께 부부처럼 나타난 '이 주임'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불확실하지만 '정안'이 정서적 교류를 하는 것은 '이 주임'이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정안'은 영화의 초반에 섹스리스 부부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섹스리스 부부의 55%는 이혼한다는 대사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 '섹스'는 단 한번 나오고, 어떤 짐승같은 열락과 행복같은 것이 아니라 은은한 미소를 띈 '정안'-섹스하는 사람답지 않은 건조하고 심각한 표정을 한 '해준'의 얼굴에 집중함으로써 이것이 '부부라는 관계의 증명 마지노선'임을 말합니다. '정안'은 봉투에 든 자라를 쥐고 나타났고, '해준'의 앞으로의 섹스에 관한 짧은 대사에도 냉랭하게 답하는 '정안'은 후반부에서 이미 관객과 '해준'에게 암시를 합니다. 이 건조함, 부부도 아닌 것 같은 느낌, 앞으로 계속 될 테고 어쩌면 우린 천천히 서로에게서 멀어질 거야. 55%에 속하게 될 지도 몰라. 이혼하게 될 지도 모르지.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요. 수산시장에서 처음 '서래'를 만난 순간, 둘의 눈을 본 순간, 침묵을 느낀 순간 '정안'은 제가 느꼈던 '인사이드 조크'를 목격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둘 사이에 무언가 있음을 알았을테고, '서래' 새 남편에게서 부재중 전화 두 통이 온 것을 본 순간 '네가 죽였냐'는 추궁은 사실 '너네 둘 사이에 뭐 있지.'였습니다.


둘은 처음 초밥을 먹을 때부터 마치 부부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초밥 역시 '정안'이 먹고 싶다고 말한 음식입니다. 초밥을 사준 순간부터 개인적인 영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경비로 처리되지도 않을 메뉴입니다. '해준'은 '서래'와 오래 산 부부처럼 손발을 척척 맞춰 먹은 자리를 치우지요. 그리고 '서래'는 마치 아주 여러번 복잡한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 사람처럼 원하는 물건을 해준의 주머니에서 꺼냅니다. 자연스럽지요. '정안'은 다릅니다. 한참 옷 위를 더듬거리고 뒤적거리고나서야 '해준'은 '정안'이 원하는 물건을 꺼내어 줍니다.


'코트 주머니', 그리고 '해준의 집'은 그들의 관계성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단숨에 집에 들어와, 커튼을 젖혀 미결 사건의 사진들을 보고 놀랐지만 또 그것을 보는 서래와 코트를 한참 더듬작거려야만 '해준'이 응답하는 정안. 정안-해준의 관계는 정안의 일방적 노력과 요청이었고 해준은 수동적이었습니다.'해준'은 사실상 두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똑같이 수동적이긴 하지만 서래와의 관계 속에서 약간 더 능동적입니다. 영화에서 '집', 혹은 '방'은 인물의 심리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미해결 사건이 붙은 벽과 복잡한 코트는 '해준'입니다. 동시에 '해준'의 사무실도 그렇습니다. 단일한 오피스 공간에, 상사가 찾아와 책상에 발을 올렸다가 떠나기 무섭게 주머니에서 물티슈를 꺼내 닦습니다. 뭐 그러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겠냐만은 '해준'이라는 인물이 가진 선이 보였습니다. 사람에 대한 선을 곧잘 그어 그에게 살가운 후배에게도, 상사에게도, 심지어 아내에게도 침입자 딱지를 붙여 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정안'은 해준의 집에 오지 않고, 커튼을 젖히지 않습니다. 해준의 동료의 전화를 대신 받지만, 서래가 그랬듯 적극적으로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고 해준에게 이것저것 묻는 대신 동네에 붕어빵 아저씨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주듯 살인사건이 발생했음을 전달합니다. 영화에서 단숨에 해준의 마음에 침투한 서래를 보여주는 것은 커튼을 젖혀 미해결 사건을 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서래가 선택할 결말에 대한 대형 스포일러입니다. 서래는 초밥을 먹은 후 손발을 척척 맞추어 정리한 것처럼 코트 속에 손을 넣어 원하는 것을 끄집어냅니다.


'해준-서래'는 세밀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서래'가 '그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 고양이가 물어온 까마귀의 사체에서 깃털을 가져오고(그것이 서래가 먹이고 돌본 것이 가져왔으니 곧 서래에 대한 것이므로), '서래'의 전남편이 산 집에서 본 술을 떠올리며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십니다. 둘은 수없이 교차하고 상대가 남긴 족적을 따라 자신의 것도 그 위에 남기지만, <박쥐>에서처럼 정사를 나누지 않습니다. 립밤을 바르는 장면에서조차 로맨스 영화 클리셰처럼 너 한번, 나 한 번 바르다 입을 맞추는 대신 딱딱하게 굳은 해준과 아무렇지 않게 립밤을 바르고 도로 넣는 서래의 모습을 그립니다. 반면 해준은 계속, 계속, 계속 인공눈물을 넣습니다. 사건을 보다 잘 보기 위한 하나의 루틴인가 싶기도 하고, 동시에 희뿌옇게 눈을 뜨고 죽은 시체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우습게도 죽음의 결말을 선택한 것은 서래인데, 앞으로 시체처럼 죽지 못해 살 인간은 해준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가 바로 미망인이겠지요.


'서래'의 집 역시 '서래'와 '전전남편'이라는 인물을 나타내는데 쓰입니다. 빽빽하게 꽂힌 레코드판, 남편의 취향일 벽지와 가구, 그 안에 서래의 것은 없습니다. '서래'는 그렇기에 자신의 것이 아닌 집안에서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재떨이 없이 담배를 피웁니다. 이 빌어먹을 집은 서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서래의 전전남편이 레코드를 들을 때 영화관 문을 닫듯 커튼을 치고 유리문을 닫는 장면은 서래의 범행을 설명하기 위한 장면인 동시에 '서래-죽은 전남편'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둘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고, 이곳은 '서래의 집'이 아니며, 서래는 남편과 동등한 위치의 관계가 아니라 그가 소유한 가구에 가깝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기에 서래는 집에서보다 해준의 집에서 더 자유로워 보이고 무심코 잘 웃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서래의 집 벽지가 가까이서 보면 녹색의 첩첩산중, 멀리서 보면 푸른색의 파도 같다는 것입니다. 전전남편이 사랑한 '산'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결국 서래만이 남을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마치 서래가 후반부 바닷가에서 입은 녹색으로도 보이고 푸른색으로도 보이는 원피스처럼요.


'서래'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전남편이 소유했던 '서래'는 몸에 이니셜이 새겨졌고 가정폭력의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서래는 치밀한 계산 끝에 그를 죽입니다-그가 더러운 세상에서 멀어진 것 같아 좋으며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말한 높은 바위산에서 말이지요. <친절한 금자씨>가 생각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죽음을 선물합니다. 가장 처음 어머니에게 그랬고, 전전남편에게 그랬고, 찰싹의 어머니에게 그랬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전남편인데, 결과적으로는 그 자신이 '아무튼 찰싹에게 죽을 게 분명하다'는 말을 그대로 이행해주었습니다. 저는 서래가 금자와 같이 복수자였다가 마침내 '서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성장이 아닙니다. 그가 '헤어질 결심'을 한 후 이포로 쓰레기 같은 전남편을 데리고 온 순간 전전남편에게 잃었던 '서래'를 되찾았을 뿐입니다. 정말 성장이었다면 서래는 쓰레기 같은 전남편을 남편 자리에 앉히는 대신 다른 길을 택했겠지요. 다만 서래가 품은 사랑이 어떤 면모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순진하고 '꼿꼿했기에' 그는 그냥 서래가 된 것입니다. 또한 큰 줄기 옆으로 낸 가지가 되는 사건으로 박정민-정하담의 사건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그냥 서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살할 생각'운운하는 대사가 나온 순간 서래를 비추죠. 대치 상황에서 총을 쏘기 직전까지는 박정민과 해준이 동일해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죽을만큼 사랑한 여자네'라는 대사에서 '죽을만큼 사랑한 여자'로 해석되겠지만, 그리고 정하담이라고 해석되겠지만, 저는 이것이 '죽을만큼 사랑을 하고 있는 송서래'였다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결국 서래입니다. 어떤 구도에서 보건 서래입니다. 심지어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에도 서래가 있지요.


영화 <헤어질 결심>은 제목을 가장 처음 보여줍니다. 헤어질 결심. 결말부를 '둘은 가정 파탄을 목전에 두고 헤어질 결심을 할 테고, 카메라는 둘의 뒷모습을 교차해 보여줄 지도 모르고, 아니면 롱테이크로 둘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결코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헤어지러 가겠군'하고 추측하도록 만드는 제목입니다.


그러나 '원전 완전 안전'과 같은 말장난처럼 <헤어질 결심>이 '헤결'로 줄어든 순간 메타적인 재미 요소가 등장합니다. 바로 '해결'과 같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서래가 불태운 사진처럼 사라질, 해결. 서래가 스스로를 바다에 깊이 파묻은 순간 사건은 종결됩니다. 해결이라고 봐야 합니다. 범인은 명백하며, 서래는 실종되었고 어쩌면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나 백골 상태의 현장 사진으로 해준의 벽에 달라붙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해결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미해결 사건입니다. 해준은 앞으로 영원히 바다를 보면, 만조의 시각이 가까워지면 숨이 막혀 입을 열고 후, 후우, 숨을 몰아쉴 테고 서래를 떠올리겠지요. 그의 숨결을 떠올리며 숨을 쉬겠지요. 숨소리가 귓가를 울릴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헤어질 결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서래가 말한 '헤어질 결심'은 관객에게 아하! 하고 전구가 켜진 것처럼 제목이 붙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착각하게 할 테지만, 사실 서래도 해준도 결론적으로 헤어질 결심은 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정안'이 했겠지요. 이것은 고요한 박제이며, 서래가 박제된 것이 아닙니다. 해준이 박제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붕괴되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살인사건에 한 여성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서래도 그것을 원했을테고, 동시에 자신이 아주 오래 남길 바랬기에 파도에 의지해 익사했습니다. 서래는 구덩이를 깊이 팠지요. 그것은 곧 해준의 집에서 벽에 붙어 있던 구덩이 속 백골 미해결 사진과 닮지 않았나요.


서래는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긴 말장난 같지만 이것은 138분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를 놓친 사랑은 비극이라지만 처음부터 둘은 시차가 맞지 않았습니다. 번역기를 통하여 남성의 목소리가 전한 한국어는 후반부 여성의 목소리로 바뀌어 더 힘있게 바뀝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차가 존재하지요. 이것을 유일하게 말소한 순간은 '내가 예쁘냐'고 중국어로 대답할 것을 종용한 순간입니다.


서래는 고양이에게 말했습니다. 그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요. 고양이가 가져온 것은 결코 길조라고 할 수 없는 까마귀였습니다. 죽음의 새를 고양이가 물어온 순간 서래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13개월간 헤어진 기간에조차 '연수'가 까마귀 깃털을 찾아낼 정도로 해준의 마음은 여전히 끈질기고 껄끄럽게 서래를 담고 있습니다. 서래는 그의 심장을 소유했습니다.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해준은 바다를 헤맸던 것처럼 다른 곳을 하염없이 헤매며 서래를 찾을 것입니다. 그의 모든 것을 복기할 것입니다. 정서경 작가는 인터뷰에서 그 모습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떠올립니다. 이 인터뷰를 읽으며 뮤지컬 '하데스 타운'을 떠올렸는데, 넘버 자체가 '나를 기다려 달라'고 외치며 계속해서 에우리디케를 찾는 오르페우스를 다룬다는 것을 떠올리면 마지막 장면이 과연 오르페우스 같기도 합니다. 그 누구도 헤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제목은 '정안'을 위한 제목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작별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마지막 장면을 보며 이성복의 시 '서해'를 떠올렸습니다.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¹인용한 인터뷰는 '[지금 칸에선]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박해일·탕웨이의 '범죄 로맨스' 통했다'

https://www.etoday.co.kr/news/view/2136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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