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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 Oct 18. 2022

잘못된 옳은 상자에 분류된 우리에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한 감상/해석

가끔 잘못된 몸에, 잘못된 시간에 덜컥 갇혀버린 듯한 황망함이 듭니다. 아무리 달려도 나를 이루는 모든 최악의 실수들이 맞지 않는 부품처럼 절걱대고, 사무실의 파티션처럼 사회가 옳다고 분류한 상자는 몸을 감싸고 죄여옵니다. 숨이 막혀올 때 우리는 생각하지요.

‘사실 이 모든 건 부질없는 일 아닌가? 이래서 얻는 게 뭐지?’


우리는 이 덜컥 찾아온 통증에 여러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현타, 때로는 깨달음(불교에서는요), 때로는 존재통, 때로는 병마의 형상을 하고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한 겹의 흰 커튼을 들추어야 보이는 갈라진 틈 사이에서 도사리고 언젠가 우리가 커튼 뒤를 엿보기를 기다립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아주 오래 울기도 하고 외로워지기도 하며 평화를 얻기도 합니다.

이것을 영화는 조부 투바키가 만든 ‘베이글’로 표현합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와 어린시절을 크림치즈처럼 바르고 양귀비와 소금, 즉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얹어 베이글을 창조했습니다.

블랙 베이글

소금은 성경에서 빛과 함께 좋은 것으로 꼽힙니다. 신이 사람에게 약속한 것에 소금이 있습니다. 소금은 그렇기에 변질되지 아니하는 언약이며 사랑의 뜻이기도 합니다. 동양에서, 특히 한국에서 소금은 부정을 쫓아내는 도구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조부 투바키는 소금과 양귀비를 올립니다. 자신이 가졌던 삶에 대한 사랑과 인간성을 현실을 잊기 위한 양귀비와 함께 아무렇게나 올려버린 것입니다. 베이글은 그렇기에 양귀비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투바키는 존재의 말소가 해갈될 수 없는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죽음만이 이 슬픔을 잊게 하리라고 생각하지요.

양귀비가 가득 핀 꽃밭을 지나는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 일행은 잠이 듭니다. 동화책에 따라 환상에 빠지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잠에 빠지게 됩니다. 잠은 죽음의 한 형태이며, 투바키가 원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면 자신의 실패마저 의미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안을 받은 것과 동일하게 안식을 얻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영화는 1부-2부-3부로 나뉩니다. 그중 1부가 끝났을 때 감독은 우리에게 착각을 유도합니다. 죽음은 영화의 끝이야. 모든 것의 끝이고, 극장을 나가기 위해 이제 일어서라구. 삶은 그런 거야. 어느날 종료되면 그거로 끝이야. 관객이 의아해하며 이토록 쉽게 끝나버린 영화를 멀뚱히 본 순간 감독은 슬쩍 웃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말이지, 그렇게 끝나지 않아. 3부의 끝을 2부의 시작으로 예고하는 것입니다.


삶을 그렇게 끝내지 마. 여기에 있자. 감독의 입을 빌려, 이블린이 말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딸-어머니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것에) 지친 딸은 그냥 우리 아무 사이도 되지 말자고, 다가오지 말고 거리를 두자고 말합니다. 조부 투바키가 단절을-검은 베이글-최선으로 아는 것은 이 원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면 나아지지요. 어떨 때는 분리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영화 에에원은 너무나도 고요하게 표현합니다. 모든 것을 떠들썩하고 이상하게 표현하는 영화에서 거의 아무 소리도 삽입되지 않고 덩그러니 놓인 돌멩이 두개만 나오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 돌멩이로 분한 에블린은 동양인 어머니가 실제적으로 행하기 어려운 ‘그 대사’, 아마도 상처받은 딸들이 간절히 꿈꾸었을 대사를 합니다. 내가 모든 걸 망쳤어. 미안해. 내 잘못이야.


조부 투바키-조이와 에블린의 관점은 다릅니다. 조부 투바키는 어머니의 강압과 기대에 본인이 멈출 수 없는 런닝머신 위에서 달리다가 자신을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런닝머신을 부수고 그 위에서 헐떡이며 경련했던 자신을 부순다면 모든 것이 편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가위로 리본을 자르듯이요. 조이 역시 그렇습니다. 이들의 관점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식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잔소리하고 자신을 품평하고 사회가 옳다고 여기는 상자에 밀어넣고 밥을 먹으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접촉을 수용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코인 세탁소 안을 달리는 어린 소녀가 있었고, 그를 잡으러 뛰어오는 술래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갈구하는 동시에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 달리는 매 순간이 버겁고 폐와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이 모든 것을 중단하고자 합니다.


영화의 핵심-딸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에블린

사실 조부 투바키는 자신을 이해하는 어머니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죽이고 보복하는 게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어머니를요. 자신을 망가트리는 것을 중단하고,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서서 자신의 베이글을 볼 수 있는 자를 찾으며 외롭게 살았습니다. 그는 사실, ‘엄마, 나 너무 힘들고 외로워. 나랑 같은 걸 느끼고 있어? 내가 왜 슬픈지 알겠어?’하고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을 각 우주의 조이는 알고 있기 때문에 단절을 답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반면 에블린은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퍼 주는 자입니다. 딸에게 끊임없이 기대하고 살을 빼라고 요구합니다. 동시에 자신도 누군가의 딸이었기에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자신의 딸의 정체성을 ‘보기 좋게’ 다듬어버립니다. 거세당한 유니콘을 만들듯 딸의 정체성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에블린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딸과 멀어질 수 없습니다. 딸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를 사랑합니다. 그를 죽이라는 아버지의 종용에 칼을 받아들지만,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어쩌면 딸의 몸에 칼을 대는 순간까지-고민하지만 에블린이 끊을 수 있는 것은 딸과의 관계와 천륜이 아닌 자신이 딸을 구속하기 위하여 감은 테이프 뿐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에블린이 조이에 대한 구속을 중단할 것을 예고하는 거지요.


에블린이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이삭이 위기에 처했듯 제물처럼 묶인 딸의 목숨을 빼앗는 대신 딸을 구속하는 테이프를 잘라낸 순간 이 영화의 결말은 완성되었습니다. 남편의 무기인 ‘사랑과 다정함’이 그 순간 에블린에게도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어요. Be kind, 남편이 말했습니다. 3부에서 이루어진 부탁은 우주의 복잡한 녹색 선을 타고 1부로 왔습니다. 에블린의 사랑은 우주를 구할 수 있습니다. 알파-웨이먼드는 무수한 실패만을 떠안아 다른 우주의 에블린들이 하나씩 특출한 재주를 가지고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 우주에서 에블린의 진실된 재능은 보통 사람은 죽었을 상황을 소화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남편과 에블린은 닮았어요. 이 실패한 우주에서 운명이 갈림길에 선 것은 웨이먼드와 미국으로 도망치는 순간부터였고, 에블린은 사랑을 택했습니다. 코인 세탁소에서 딸을 낳은 것도, 그리고 줄곧 그 애를 사랑하여 딸을 죽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외치며 아버지에게 맞서던 것도 에블린이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단 하나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다정입니다. 에블린이 계속해서 딸에게 다가가고, 잔소리하고, 심지어는 돌멩이가 되어서도 딸에게 다가가는 힘을, 무서운 힘과 맞서는 것은 모두 사랑을 원료로 합니다.

다시 ‘조이’에게로 돌아갑시다. 영화에서 의상과 메이크업에도 감독은 메시지를 넣는데, 이것을 드레스 메시지라고 합니다. 저는 영화 속 조이의 메이크업이 하나같이 운 얼굴, 화려한 글리터와 색채로 표현한 우는 얼굴이라는 것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그 어떤 우주에서도 에블린은 조이를 놓지 않았을 테고, 조이는 어머니 탓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하여 어머니의 ‘옳은 상자’에 몸을 집어넣어야 했을테고, 종종 아니기도 했겠지만 그것이 조이에게 기쁨을 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조이의 죄책감이었고 사랑이기도 했을 거예요.

블랙 베이글 앞에 선 조이의 의상은 하나같이 너덜너덜합니다. 부조화에, 색채는 알록달록하고, 이리저리 꿰매어 붙여둔 이상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럽지만 서글픈 의상에는 드레스 메시지가 있습니다. 꼭 세탁소에서 아무 옷이나 꺼내어 만든 의상같지 않은가요? 조이는 어머니를 증오하지만 동시에 사랑합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일부입니다. 조이의 의상은 그렇기에 특별합니다. 그것이 ‘조이’의 정체성이니까요. 이민자 2세, 혼란스러운 정체성과 동시에 여성을 좋아한다는 정체성, 어머니가 물려준 사회적인 기준에 맞춘 일부, 그리고 저 너머 우주의 어딘가에서 슬퍼하고 기뻐하는 수많은 조이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이는 어머니가 손을 놓은 순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습니다. 바로 이 순간 실제로 사라진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얼굴, 사실은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던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 진실로 자신이 옳았고 이 고통이 끝날 것인가에 대한 의문.


조이는 3부에서 묻지요. 엄마는 왜 성공한 나를 다른 우주에서 찾지 않느냐고. 그의 엄마가 되고 싶지 않냐고요. 아니, 에블린은 영영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딸은 여기에 있어요. 다른 우주에 있는 것도 그의 딸이지만, 보세요. ‘내 딸’은 줄곧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을 뜻하는(조상님 맙소사!) 문신도 했고(마음에 안 들지만) 여자친구도 있고(이것도 싫지만!) 그래도 이 애는 ‘내 딸’입니다. 에블린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설령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되찾는 일이라고 해도 에블린은 딸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 수많은 우주와 조이를 천칭에 두어도 에블린은 조이를 택합니다. 그 애가 자신의 딸이니까요. 그것만큼은 그의 딸이 레슬링 선수 옷이며, 무슨 오트쿠튀르 비슷한 옷에 아이돌-락스타 옷이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의상을 닮은 옷에 모르는 새끼돼지를 강아지처럼 끌고 들어와도 변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 애는 에블린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예요.


블랙 베이글로 조이가 오르는 순간은 사람과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리고 떠나기 위하여 조이 혹은 조부 투바키는 평범한 여자처럼 걸어 계단을 오릅니다. 그리고 그를 쫓는 가장 끈질기고 이기적이고 상처를 가장 많이 주었으며 세상에서 조이를 가장 사랑하며 아끼고 조이를 낳은 여자는 기를 쓰고 조이를 죽음에서 가로막기 위하여 애씁니다. 그녀를 너무나도, 어쩌면 자신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귀한 내 새끼니까요. 그래서 고요의 장면, 롱테이크 속 돌멩이로 분해서도 에블린은 딸에게 다가가고 또 다가갑니다. 하필이면 계단인 것에 대해서는 영화 속에서 계단을 활용한 메타포중 어느 것을 택해도 들어맞겠으나 저는 두 사람의 관계가 계단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계단을 오르고서야 에블린은 성장합니다. 택시를 타고 떠난 순간을 후회하던 여자에서, 딸을 구하기 위하여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하는 지혜로운-조이의 여자친구가 말했듯-어른이 된 것입니다. 에블린은 계단에서 사랑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남편에게 배운 것이지요. 에블린은 여기서 남편이 사용하는 무기, 자신에게 난사된 총알을 변화시켜 ‘가짜 눈’을 던집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이마에 붙습니다. 자신의 이마에도 붙여지지요. 바로 그 순간 에블린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 계단을 사랑으로 올라야 한다는 것을,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눈을 감은 사람은 에블린이었고 이 계단에 선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사랑을 이루어지기도 하고, 자신이 빼앗은 우정을 돌려주기도 하며 자신이 만든 갈라진 틈을 붙입니다. 그건 에블린이 인생에서 가장 잘 하는 일이예요.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기. 에블린은 비로소 눈을 뜬 사람들, 자신이 눈을 붙여준 사람들에게 진실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가짜 눈’은 곧 ‘눈’입니다. 그들은 지혜를 얻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지혜를요.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힘을, 나를 슬프게 하는 모든 것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진짜 힘’을요. 그건 차원을 건너 다른 차원 속 우수한 나를 찾아 덧씌우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우주입니다. 갈라진 틈을 붙일 수 있는 것은 풀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훼손된 우주를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다정함과 사랑만이 갈라진 세상을 이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멀티버스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sf적 지식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다정함과 사랑이 우리를 존속하게 하고 갈라진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거야’니까요.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진심으로. 1부에서 분노한 적에게 맞서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한 조건은 바로 ‘사랑하라’였습니다. 그가 어느 우주에서는 사랑하는 상대였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동시에 다중우주가 이어져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중요한 건 사랑이 우리를 이어놓을 수 있습니다. 훼손된 관계는 훼손한 사람이 붙일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는 마음 말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에블린은 투사였고 꽉 쥔 주먹은 때로는 조이를, 떄로는 웨이먼드를 상처입혔습니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며 삶의 방식을 사랑으로 바꾸고나서야 에블린은 자신의 우주에서 딸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에블린은 딸의 여자친구에게 어른들 하는 잔소리처럼 머리를 기르라고 잔소리하고, 딸에게는 살이 쪘으니 좋은 것을 먹으라고 싫은 소리를 합니다. 그런 것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딸의 여자친구에게도 잔소리를 하는 것은 에블린이 딸의 여자친구도 자신의 사람으로 들였다는 증거이고, 남편에게 입을 맞추며 수줍은 얼굴을 한 것은 그가 변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변곡점을 지나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삽니다.

현재의 우리는 엉망에, 가끔 블랙 베이글에 뛰어들고만 싶고, 잘못된 상자에 타인의 손에 의하여 분류되어 쑤셔넣어지는 바람에 아픈 몸을 끌어안고 울었으며 아무리 달려도 최선의 나를 만들어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친절합시다. 다정합시다. 왜냐하면 우주는 사랑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찢겨나가면 붙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다정이니까요.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개를 사랑해도 좋고, 영화를 보는 것을 사랑해도 좋고, 가족을 사랑해도 좋고, 여자와 남자를 사랑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웨이먼드의 말처럼 이것은 순진한 시각일지도 모르지만, 보세요. 결국 우주를 지탱하고 복원하는 거대한 힘은 사랑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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