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와 조율사의 재량
크리스티안 짐머만이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공통점은 대단한 피아니스트라는 점 외에도 자신의 피아노를 공연장소에 들고 다닐 정도로 소리에 민감했다는 것이다.
피아노를 들고 다닐 정도는 아니더라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나 연주자들은 자신의 악기 음색이 정확히 작곡가나 자신의 의도를 반영해야 하기에 무척 민감하다. 특히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에게는 전속 조율사가 있어서 주요 도시에 공연장에서 배치된 피아노를 반드시 특정 조율사의 손길을 거치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조율사는 늘 무대 뒤의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 공연이 끝난 뒤 연주자가 그 조율의 명인을 불러내 관객의 박수를 유도하는 아주 보기 드문 경우도 있다. 피아노 조율사의 세계도 음악에서 흥미로운 영역이다.
서양음악에서 사용하는 연주 기호로 '템포 루바토'(tempo rubato)가 있다. 약칭해 '루바토'로 부르는데 특정 프레이즈의 연주에서 템포 또는 리듬을 어느 정도 자유로이 조절하여 연주하라는 뜻이다. 물론 특정 악구에 한하고 악곡 전체의 전반적인 템포를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
조율의 영역도 연주자나 곡목, 장소의 특성에 따라 자신의 음색을 일정한 범위에서 조정해 최상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조율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미세하게 차이가 날 수 있다. 밝고 높은음을 요구하는 연주자나 묵직하고 낮은음을 바라는 연주자에 따른 주문도 수용해야 한다. 조율사는 언제나 연주자의 취향을 맞추는 조연이고 크게 보아도 루바토와 같은 국한된 영역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일본 작가 미야시타 나츠의 소설 <양과 강철의 숲>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피아니스트가 자신이 조율한 악기로 연주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조율사가 느낀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한 부분이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피아노가 음색이 음악이 무엇이 아름다운 지도 헛갈릴 정도였다. 그저 무대 위의 새까만 숲에서 아름다움이 흘러넘쳐 홀을 채웠다. 이타도리 씨가 만든 음색을 들어보려고 했지만, 그조차 무리였다. 소리에 색이 있다면 무색에 가깝다. 소리는 피아니스트가 바라는 대로 색과 형태를 바꾸며 우리에게 도달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듣기만 할 뿐인데 음악과 하나가 된, 그 일부가 된 것처럼 황홀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타도리 씨의 소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안다. 이상적인 소리다. 연주하는 사람을 위한 소리. 피아니스트의 실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소리. 아무도 조율사의 실력 따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피아니스트가 절찬을 받더라도 피아니스트의 공로도 아니다. 음악의 공로이다.
- <양과 강철의 숲> 107쪽
보통 피아노의 기준음인 '라' (바이올린의 경우 A선) 음은 440 헤르츠로 정해져 있다. 헤르츠는 1초 동안 공기가 진동하는 횟수를 말하는데, 이에는 흥미로운 배경이 있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전 세계 공통으로 440 헤르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통 오케스트라 공연의 경우 음색이 맑고 가장 정확하다고 알려진 오보에 주자가 이 '라'음을 불어서 기준음을 잡고 시작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고전시대 유럽에서는 422 헤르츠가 기준음이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435 헤르츠까지 이르렀다가 현대에 440 헤르츠까지 올라온 것이다.
소설에서 조율사들도 대화한다. "다들 초초해하는 것 같아요. 기준음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걸 보면요" 확실히 현대로 오면서 클래식 음악도 밝고 높은 소리로 진화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추세라면 100년 후에는 460 헤르츠에 육박하지 않을까.
연주자가 '루바토'라는 악상기호를 응용하는 수준이나 조율사의 '감'은 언제나 정도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언어처럼 악기와 음악의 언어도 하나의 약속이다. 작곡가와 연주자, 나아가 관객들과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넘어서서 관객의 귀를 거스르게 하는 조율이나 루바토는 우리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무대 위의 음악가는 조율사의 보조를 받고, 정치가나 기업의 리더는 참모들의 조언을 받아 자신 만의 루바토를 발휘하기도 한다. 작곡자의 의도가 담긴 악보를 심하게 넘어서면 공연은 성공하기 힘들듯 어떤 영역에서나 정도를 벗어난 루바토는 때로 화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