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뉴 노멀

by 호림

체코 이민자로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수줍은 소년이 관심을 가졌던 유일한 과목은 미술이었다. 3형제 중 막내로 형들이 노점상을 할 때 그림을 그려서 25센트 정도에 팔기도 하며 일찍이 상업성에 눈을 뜬다.


뉴욕에 청운의 꿈을 품고 와 상업광고나 잡지 디자이너로 일하며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예술계의 벽은 높았고 그의 작품은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일찍부터 탈모가 시작돼 개성이 넘치는 스타일의 가발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한다.


마를린 먼로의 죽음은 그에게 기회가 되었다. 먼로의 금발을 강렬한 노란색으로 표현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교회를 착실히 다니던 탓인지 먼로의 얼굴과 목 주위는 은은한 검정을 사용해 성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며 미국인들의 먼로에 대한 추모와 연민의 마음을 자극한다.


현대 상업미술 아이콘의 하나로 강력한 브랜드가 된 앤디 워홀, 예술가로 가는 문은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며 스스로 길을 열어가다 57세로 타계했다.


뉴욕의 뒷골목을 배회하던 라틴계 청년이 벽에 낙서하듯 그린 그라피티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장 미셀 바스키야는 경매에서 수천억 원의 가격의 작품이 거래되며 작품 가격면에서도 "검은 피카소"가 되었다.


'뉴 노멀'이라는 용어를 광고에 써 주목을 받았던 자동차 회사의 임원이 시대정신의 준거와 소비의 표준은 늘 변화함을 일깨우며 광고 제작 후기를 전한다. 길을 만들어간 사람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터너 이전에 영국엔 안개가 없었다." 영국의 국민화가에 붙이는 최고의 칭송이 아닐 수 없다. 윌리엄 터너가 당시에 천대받았던 풍경화를 예술의 한 장르로 만들었던 힘은 그림에 대한 무한 열정과 관찰정신이었을 것이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도 역동적인 바다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밧줄로 돛에 꽁꽁 묶게 하고 바다의 성난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저 흐릿한 안개를 시야를 방해하는 성가신 존재로 보았던 많은 영국인들에게 터너는 '런던 포그'의 가치를 증명하듯 멋지게 캔버스에 흐릿한 풍경들을 구현해 '뉴 노멀'을 만들어냈다.


(42) Silvery Waves. A.P.Wyman - 와이만 은파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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