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께서 지금 보시는 이 여자는, 인생의 커다란 슬픔마저도 기말고사 공부 하듯 때려박기로 이겨내려고 합니다. 뭐든지 열정을 가지고 하면 답을 찾을거라고 믿는 모범생의 삶 그대로이지요.
작년 가을 일주일 동안 11개의 글을 썼습니다. 아니 써제꼈다는 표현이 더 맞겠습니다. 갑자기 떠나버린 엄마를 애도하고 제 상처를 위로하기 위한 일종의 셀프 테라피 방침이었지만, 비탄의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어설프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죽음과 상실을 직면하다 말고 제가 갑자기 꿈과 명상의 세계로 도피했기 때문입니다. 브런치에 써내려 간 담담한 글의 내용과는 달리, 저의 심리상태는 하루하루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혼자만의 열심이 바닥 나면 그땐 무엇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할까요? 이제는 모두에게 새롭지 않고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돼버린 바로 그 공감입니다. 내가 겪는 일, 내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나의 생각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발견입니다.
가족의 죽음은 개개인에게 엄청난 사건이지만 이 브런치만 해도 죽은자에 대한 애도의 글은 너무나 많습니다. 타인의 죽음, 특히 병사는 안타깝기는 해도 적어도 대부분 새롭지는 않은 얘기입니다. 더욱 사연있는 죽음이나 극적인 에피소드들이 아니라면 (잔인하게도) 읽을거리로서는 상품성이 없지요. 게다가 저는 평소에 프로덕트 매니지먼트 관련 글을 쓰고 있었으니, 대부분의 구독자분들에게 무슨 도움되는 정보랄 것도 없는 쌩뚱맞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공개된 곳에 다소 평범한 수준의 애도의 글을 쓴다는 건, 공감과 위로라는 대가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외로움을 얻는 직행 티켓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저의 홀로 투병기가 함께하는 매거진이 되면서 저는 이 지루한 공감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배웁니다. 매거진에 또 다른 한 분, 경계인님이 참여하셨거든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부모님, 간병하는 직장인, 가난과 같은 집안의 어려움, 어린시절을 빼놓을 수 없는 부모님과 형제와의 관계, 부모님의 독특한 캐릭터 이야기들이 저의 것과는 다르면서도 또 비슷한 결로 풀리는 걸 지켜봤습니다. 마무리하지 못하고 샛길로 새서 방치된 제 투병기가 다시 의미있게 채워지는 게 보였지요.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공감은 지금 당장 내 고통스런 상처에 누군가 거즈를 대주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내 고통이 감응할 때, 어떤 메시지가 제 내면에서 속삭이듯 말을 겁니다. 힘내, 응원해 라는 직접적 말보다 더 미묘한 그것은 제가 스스로에게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 위로였습니다. 사람들의 보편적 나약함과 강인함 속에서 제 모습을 보는 거지요. 제게는 다른 이야기, 인생 스토리가 필요했던 거였습니다.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타인의 것을 들으면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힘이 깊어지는 듯 합니다.
경계인님과 말씀을 나누고, 이 투병기 매거진 참여를 다른 분들에게도 열어놓기로 했습니다. 저와 경계인님은 각각 11편, 12편으로 투병기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이 매거진이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께 레퍼런스, 가이드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계인님과 저의 투병기로 끝나도 매거진 참여를 닫지 않겠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발견되었을 때 주저하지 마시고 <매거진 참여 신청>을 하시거나 제 프로필의 <제안하기>를 통해 연락 주시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 가족을 떠나보내신 분 (반려동물도 환영합니다)
- 글쓰기로 애도하며 에세이 테라피를 하고 싶으신 분
이 외에 다른 요건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