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무니, 나의 시어머니

by 은선

어무니, 오늘도 언선이 준다꼬 미역국을 한 그 끓였지예.
조개랑 표고버섯, 쇠고기까지 넣어서 그런가 밥 없이도 미역국만 훌훌 잘 들어가데예.

아래께 어무니가 아버님 병문안 가셨을 때, 어무니 집에서 미역국 냄비째로 제가 몰래 가와서 퍼먹었는 거 기억나시지예.

그 정신없는 와중에 "니 내 국에 손댔나?" 하고 아들한테 물어봤다 아닙니까
오빠가 "은선이가 가갔다"라고 하니까 어무니는 “언선이가 무쓰면 됐다”라고 하셨지예.

어무니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돼 가꼬, 어무니 국이나 훔쳐 묵었는데 다음 날 또 끓여갖고 주시니…

이 도둑놈은 웁니다.

어무니,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요.
어무니 그 복잡한 머릿속, 수갈래의 길 중 어디를 걷고 계신가요.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시집살이하던 그때인가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큰딸을 스무 해나 키워 놓고 떠나보냈던 지옥 같은 시절인가요.
아니면, 그보다 더 먼, 어릴 적 어무니가 쑥캐러 다니던 그 고향 들판에 계신가요.

행복했던 시절에만 계시기를,
그 기억의 길로만 걸어가시기를 바라요.

어무니, 조울증으로 얼마나 힘든 삶을 견뎌오셨나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어무니가 그냥 많이 이상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어요.
몇 시간이고 저를 붙잡아 옛날이야기를 하실 때,
전 그냥 어무니가 저랑 친해지려는 건 줄 알았지요.

그래서 저도 제 과거를 털어놨어요.
친아빠가 돌아가신 이야기, 새아빠가 저를 힘들게 했던 이야기, 부도나서 도피생활 했던 이야기까지…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세 살짜리 딸을 재우고 자고 있는데 거실 문이 '쿵쿵' 울렸어요.
열어보니 어무니가 서 계셨어요.

새벽기도 마치고 보슬비가 내려 우산을 가지러 오라고 했는데 제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저희 집까지 직접 찾아오신 거였어요.
저를 혼내려고요.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한 달 뒤 친정엄마가 들려준 얘기에 저는 무너졌습니다.
그날 어무니는 친정엄마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셨어요.
‘자식을 본데없이 키워놨다.’
‘아직도 도망자 신세면 내가 경찰에 신고해 버리겠다.’

엄마가 받은 상처, 그리고 저의 배신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아버님이 어무니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셨죠.

그때 이후로, 저는 어무니가 너무 미웠어요.
아무리 정신병이 있어도, 제 과거를 약점 잡아 그런 식으로 공격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입덧이 심했을 때, 어무니가 해준 음식만 입에 들어갔어요.
친정엄마가 끓여주신 미역국보다 어무니 미역국이 더 맛있었어요.
그래서 더 서운했고, 더 아팠고, 배신감이 들었어요.

그 후로 저는 어무니를 멀리했어요.
말도 줄이고, 마음도 닫고, 적당한 거리를 두려 했지만, 결국 아주 멀리, 저만치 떨어졌지요.

그러다 우연히 다시 만난 어무니는 숟가락조차 입으로 가져가지 못할 정도로 손이 떨리고 있었어요.
파킨슨병 인가 싶었죠.

‘이제 어무니를 내가 모셔야 하나?’라는 생각에 나의 삶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어요.

어무니는 점점 안 좋아지셨어요. 기저귀를 차게 되었고,
어느 날 아침, 눈만 덩그러니 뜬 채 의식을 잃으셨어요.

급히 119를 불러 대학병원으로, 또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또 옮겼어요.
검사 끝에 내린 진단은 간문맥 기형으로 인한 간성혼수.
의사는 길어야 3개월이라고 했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멍해졌어요.
그리고 본 적 없는 어무니의 인생이 제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어요.

그 길고 외롭고 외로운 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너무 슬프고 억울하고, 안쓰러워서 눈물이 났어요.

어무니도 얼마나 어린 자식들 해먹이고, 사랑하고 싶었을까요.
지독한 우울증으로 입원해 있던 동안,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신랑은 말하더라고요.
자기는 혼자 컸다고, 어무니한테 사랑도 못 받고 밥도 못 얻어먹었다고 원망했대요.

그런데 이제 가정을 꾸려 자리를 좀 잡으려 하니,
아버님은 췌장암, 어무니는 간성뇌증으로 인해 정신과 약도 못 드시고, 조울증이 극에 달했어요.

매일같이 아들에게 전화하시는 어무니.
횡설수설하시고, 웃다 울다 앞뒤가 없는 말씀을 하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라 가라 부르셨어요.

신랑은 이제 너무 지쳤데요

어무니의 말을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데요.


아마도 어무니 머릿속 그 방 안에는
온갖 기억과 단어들이 어질러져 있는 것 같아요.

말을 하시려면 그것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조립해야 하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그래서 그냥 집히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우리에게 던지시는 거겠죠.

어무니, 저는 아직도 어무니가 던지시는 그 말들을 다 이해할 수 없어요.
어무니는 저에게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고,
저는 어무니를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어무니가 너무 가엾고, 안타깝게 느껴져요.
동정일지라도, 저는 이제라도 어무니를 이해하고 싶어요.

언선이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끓이시는 어무니.
아들이 좋아하는 열무김치를 여름마다 담그시는 어무니.
말로 하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어무니의 사랑이었다는 걸
이제야… 너무 늦게 깨달은 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아래께도,
어무니 없는 집에 들어가
끓여놓은 미역국을 냄비째로 훔쳐간 며느리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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