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봅니다.

『기적의 시간』

『기적의 시간』 글 그림 로버트 맥클로스키| 김서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바람을 볼 수 있을까요?

빨래가 펄럭이는 것을 볼 때, 창문이 덜커덩 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바람이 분다고 생각합니다. '볼에 와 닿는 미풍' 이런 표현처럼 느낄 수는 있겠지만 바람 자체를 볼 수 있을까요? ‘바람을 보다’는 맞지 않는 말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결을 이야기 속에서 풀어낸 그림책이 있습니다.


62페이지에 달하는, 꽤 글이 긴 그림책입니다.

글을 먼저 읽었습니다. 처음에 그림은 좀 밋밋하게 느껴지며 이야기를 그냥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림만 따로 떼어 자꾸 보다 보니 어떤 특별함이 느껴집니다. 색감이 부드러우면서 조화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가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산, 섬, 구름, 바다, 인물이 아무렇게나 혹은 무심하게 그려진 듯 보였습니다. 세밀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추상의 색 면, 색의 덩어리로 자연을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자꾸 보니 마치 자연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다양한 색과 농담은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걸 볼 수 있지요.”

시간의 흐름, 바람의 숨결을 본다는 표현은 생경합니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집중하거나 주목하는 감각이 아니며 두 개가 자연스럽게 조응한다고 쉽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체감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본다?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시계를 보면 시간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자연에서 시간의 흐름을 본다? 그것은 자연 속에 오래 머문 사람만이 느끼고 알 수 있는 표현인 듯 여겨집니다. 『기적의 시간』은 그림으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섬 저쪽 하늘에 구름이 있습니다. 구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며 커집니다. 구름이 닿는 곳마다 언덕에 구름 그림자가 드리우며 점점 어두워집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섬들도 하나씩 차례로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만 저쪽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구름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아이들이 서 있는 섬에도 비를 흩뿌립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쪽에 서 있는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숲속에서 고사리가 자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초고속으로 촬영한 영상으로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계의 도움을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고사리가 펴지는 소리를 들어보라 합니다. 고사리가 펴지는 소리? 그것은 어떤 소리일까요? 정말 들리는 소리일까요?


“죽은 나뭇잎을 옆으로 밀어 내며, 고사리가 돌돌 말린 머리를 천천히 펴는 소리, 천천히 늘이는 소리.”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


라고 작가는 표현합니다.

KakaoTalk_20200514_094312926_04.jpg 위의 책 한 페이지, 로버트 맥클로스키 그림


책을 보는데 모든 감각이 자극을 받습니다. 눈과 귀를 쫑긋하게 됩니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언니는 노를 젓고 동생은 배 옆 면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수면을 쓰다듬고 있습니다. 손에 부드럽고 따뜻한 물결의 움직임이 와 닿겠지요?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보트에서 누리는 여름날의 평온함이 느껴집니다.

KakaoTalk_20200514_094312926_01.jpg 위의 책 한 페이지, 로버트 맥클로스키 그림


태풍이 오기 전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부산스러움, 태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함, 태풍 후 조금씩 모습을 바꾼 것들을 다시 정비하는 부지런함과 분주함도 느껴집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창문에 달라붙어 얼어 있는 소금 때문에 생긴 낯선 빛에 눈을 뜹니다. 부드러운 아침입니다.


밤하늘의 별은 하늘뿐만 아니라 물 위에도 똑같이 노란 점으로 박혀 빛납니다.

KakaoTalk_20200514_094312926_02.jpg 위의 책 한 페이지, 로버트 맥클로스키 그림


이 책을 읽고 나면 온 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되살아납니다. 내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느낌, 주위의 자연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조금 더 섬세해진 감각으로 한 그루 나무를 보게 됩니다. 구름도 달리 보이고 바람도 조금 더 느껴집니다.


달콤하고 아련한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여름, 얼마간의 기간 동안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이란 이렇게 나를 깨우고 여유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적의 시간』은,

뭐를 해도 새로운 것이 없고 아무런 자극도 느껴지지 않고, 일상이 따분하고 감각이 무뎌졌을 때 내 몸의 세포와 감각을 하나하나 깨우러 어딘가로 떠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하나의 그림


호수일까 바다일까 강일까

옅은 핑크색으로 펼쳐진 물위로

섬 혹은 산들이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하늘에는 여러 색의 구름이 층층이 쌓여 있다.

저 먼 곳에는 비를 흩뿌리고 있는 것도 같다.


구름은 서서히 다가오고 사위는 점점 어두워진다.

이곳에도 비가 오겠지.


물을 많이 머금은 붓으로 슥슥 칠해서

덩어리로 표현한 물, 구름, 산, 섬

그 속에서 인간은 정말 너무도 작다.

고요하고 부드러운 색감과 분위기


그 속에 하염없이 앉아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고 싶다.


위의 책 6~7p, 로버트 맥클로스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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