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by 김작은
누구든지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잘 곳을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혹시 현실이 아닌 것도 존재할까?
1572585524290-2.jpg 출처 : @jinjinaa_ 님이 제주에서 보내주신 이미지


거칠게 분류해 보자면 현실 너머의 '어떤'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물론자일 것이다. 생명의 유래에 관심은 있지만 절대자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 물질을 초월한 세계가 없기에 사후관 역시 없다. 다만, 이들은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유물론적 세계관이라면 추구해야 할 이상이 존재하지 않고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도덕 법칙이 생겨날 수 없는 구조라고 비판한다. 유물론자들은, 그럼에도 조화로운 생활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합의에 의한 법칙들을 만들어간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불가지론자들은 말 그대로 현실 너머의 것들을 명약관화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혜라고 배웠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는 현재의 한계점을 인정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결국, 지금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인 것이다. 현재 알고 있는 것에서 모든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면, 알아가는 과정의 종지부를 찍는 셈이 된다. 모른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제대로 알기 위한 지혜가 되지만, 불가지론자들의 결론까지 이와 동일할지는 미지수다. 불가지론자의 태도는 자칫, 제시되어 있는 사실이나 의미조차도 잘 모르겠다고 어영부영 넘어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입장과 존재의 유무는 모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 관계가 없어 보이는 입장에서 보자니, 현실 너머의 존재는 그 가치가 매우 빈약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 너머의 것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이상적인 세계일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품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의 발전은 '상상력'이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한다. 상상력이라는 것은 현실 너머의 것을 관념에서 구현해내고, 지향하도록 만든다. 원시 부족에서는 먼저 예상을 하게 된다. 사냥이 반복되며 사냥감의 출몰지역이 동일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복적인 패턴으로 예상이 가능해지고, 그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나무 뒤, 산 너머, 물속 등의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상상 가능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현실을 뛰어넘는 발전을 해온 것이다. 종교나 신앙마저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선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신적 영역을 상상해내는 것이다. 그것에다가 바라는 마음을 입히면 신앙이 된다.


보편 진리와 절대자 없이 탄생하는 종교와 신앙은 불안할 것 같지만, 유발 하라리의 논리적인 설명과 제시되는 역사적 사료들, 그에 따라 도출되는 결론의 정합성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상상력이라는 것이 현실 너머의 것이라면, 그렇게 신앙이 탄생한다면, 신앙과 현실은 근본적인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상 세계와 현실세계의 차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잘 드러나게 된다. 현실과는 다른 완전한 이상세계인 이데아를 그림으로써 이원론적 사고가 극명해진 것이다. 하지만, 철저한 이원론적 사고는 플라톤 철학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그는 궁극적으로 현실은 이데아와 구별된 세계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현실이라는 거울을 통해 이데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물리적으로는 영적이고,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이데아에서의 선험을 통해 현실에서 이데아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독교의 신앙관도 이와 비슷하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결코 동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다. 성경에서는 신(이상)이 인간(현실)에게 찾아온다. 우리는 현실 너머의 것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이뤄지는 이상을 체험하기도 한다. 플라톤이나 칸트처럼 선험으로 인한 지혜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론적 터득이든, 불교의 고집멸도이든, 유학의 삼강오륜이든, 헤겔의 변증적 구조이든, 데리다의 해체적인 분석이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든, 양자 물리학의 발달이든.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이상의 조화를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모든 과정을 답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답을 찾아가려는 가능성과 방향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사견으로는 가능성과 방향성을 신앙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과정에서 답을 정의해버린다면 정의된 답은 부패하고 만다.

신앙은 도착점이 아닌, 가능성과 방향성의 운동점인 것이다.


생이 계속되는 이상,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잘 곳을 고민하는 것이 해결되기도 하지만 아직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고민은 형태를 달리하여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상이 제시하는 것은 '고민'을 덜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앙(방향성, 가능성)은 도착할 수 없는 운동점이 된다.




어쩌면 현실의 '고민'을 없앨 수 있는 이상적 세계의 모든 것을 제시한 신은, 부재한 것과 다름없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