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 다닙니다.

영웅은 없고 빌런만 있는 세계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by 김작은

안녕하세요. 중소기업 몇 군데에서 일해 봤고, 현재도 일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김작은'입니다.


제 경험으로 비추어보거나 친한 사람들의 회사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마블이나 DC처럼 [중소기업 세계관]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들과 차이가 있다면, 이 세계관엔 영웅은 없고 빌런만 존재한다는 것이죠. 벌써부터 머릿속에서 수백 가지 빌런 사례가 떠오르지만 시작하는 글이니만큼 저부터 빌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입사 초기의 사례를 들어볼까요?


제가 다니는 회사는 경영진이 전부 가족들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가족회사이며 전형적인 가,족같은 회사랍니다.(적절한 쉼표 오기입은 넘어가도록 할게요!) 경력직 총무로 입사하면서 업무 인수인계는 전혀 받지 못했고, 팀도 새롭게 병합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였죠. 팀장님도 본인의 포지션이 애매해져서 곤란해하시더군요. 그래서인가 입사 초기에는 경영진분들, 특히 대표님께서 팀장님을 거치지 않고 제게 직접 업무를 지시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총무인데 다른 팀들의 일까지 발을 걸친 잡스러운 포지션이 되어 있더군요.

덕분에 회사나 일의 체계를 따른다기보다는 개인 대 개인으로 대표님과 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마주한 개인으로서의 대표님은 상당히 어려운 존재였죠. 지시하신 업무에 피드백을 드리면 꼭 처음 하신 말씀과 다른 말씀을 하셔서 당혹스러웠거든요. 하지만 저도 이모저모 다양한 경력을 쌓고 들어왔으니 나름의 대처방안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예의 바른 사무직 빌런 되기!


첫째,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내용은 캡처하여 보관하기.

수시로 다른 종류의 일들이 주어질 경우에는 지시 업무를 잊거나 헷갈리지 않고 정리하기에도 좋은 방법이랍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자료로 대표님께 따지듯 들이밀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죠! 이 자료는 참고용으로써 다음 방법으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둘째, "언제 지시하신 이 내용의 일은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다소 과하게 보고드리기.

바로바로 드릴 수 있는 피드백에선 필요 없겠지만 보통 며칠 걸리는 업무일 경우에는 군대에서 하는 복명복창처럼 지시하신 내용을 고스란히 복창한 후에 답변을 드리는 거죠. 이럴 때 캡처해둔 자료를 참고만 하면 됩니다. 혹시 메신저 기능에 상대의 말에 답장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대표님이 지시하신 메시지를 찾아서 답장으로 해도 되겠지요.

사실 이 방법은 말 바꾸기 빌런에 대한 대처방안이기도 하지만, 습관이 되면 일반적인 업무에서도 괜찮은 소통 방법이에요. 사담이야 간결하고 재밌게 하더라도 업무적인 대화는 오해를 사지 않는 게 더욱 좋거든요!


셋째, 감정적인 언어보단 사무적인 언어로 최대한 예의 바르게 구사하기.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아 다라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이렇게까지 보고드렸는데도 다른 말씀을 하신다면 일단 죄송하다고 해야 합니다. 회사는 보통 권력의 상하관계에서 비롯된 트러블이 많기에 밉보이면 회사 생활이 힘들어지거든요. 죄송하다고 사과한 후에 "처음에 하신 대표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그럼 제가 다시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최대한 일을 한다는 느낌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절대 말씀이 달라졌다는 책임을 대표님께 전가해선 안됩니다. 감정을 섞어서도 안되죠. 모든 잘못은 내게 있다는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멘트를 정해야 합니다.(이미 멘트에서 책임을 물은 거나 다름없지만 마음만은 순수하게!!)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이게 뭐가 빌런이냐고 의아해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웹툰과 드라마로 나온 [미생]을 참고해 볼까요? 주인공인 장그래는 드라마로 보면 9화에서 엄청난 빌런인 박 과장을 만납니다. 장그래는 부당한 일들을 당해도 멍청해 보일 정도로 참아가며 바둑 기사 이창호의 말을 읊조리죠.


순류에 역류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상대가 말을 바꾸고 싶어 하는 빌런일 때 말을 바꾸지 못하게 한다면 상대에게 저는 빌런이 됩니다. 사실 저는 미흡한 사람인지라 이 과정에서 캡처한 이미지를 대표님께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셨던 말씀은 이런 뜻이 아니었나요?"라고 따지면서 말이죠. 그래요. 대표님께서 보시기에 저는 빌런 직원인 겁니다. 그 후로 다시는 개인 메신저로 업무를 지시하지 않으셨어요. 비로소 부대표님이나 이사님, 부장님을 통하여 업무가 하달되었지요. 그렇게 된 지가 벌써 2년은 된 것 같네요. 이 방법은 효과가 직빵인 만큼 리스크도 크기 때문에 부디 여러분들은 높은 레벨의 사무직 빌런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