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치킨집 담벼락에 기대 서서(2)
실패교과서
1부에 이어서.
아버지가 마지막 치킨을 사 오셨다.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늦은 밤이었다.
"이거 함 묵어봐라."
웬 유명한 치킨 프랜차이즈와 매우 비슷한의 비주얼이었다. 얼마나 비슷했는지 처음엔 그 유명 브랜드인 줄 알고 먹다가 이게 아닌데 싶어 자세히 보니 다른 이름이었다.
"어떻노. 인테리어비 싸게 해 준다카던데 함 차려 볼까."
그 시절,
은퇴하면 치킨집 차린다고 사람들이 우스개 소리를 하던 때였는데, 막상 우리 아버지 입에서 직접 전해 들으니 철렁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먹어본 소감을 과감 없이 전달드렸다.
"여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15년이 지난 지금도 전국 어디에도 그때 그 이름을 가진 치킨집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를 말린 건 잘한 일 같았다.
아무튼,
느닷없이 치킨집을 차리시겠다는 아버지는 금융권 회사에서 임원으로 계시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물러나시게 되었다. 그래도 금융위기가 터지고 2년 동안 버티시다가 퇴직하셨다. 어머니께 듣기로는 나 때문에 버티신 거라고 하셨다. 아직 대학도 2년이나 더 다녀야 하는데 수입이 끊겨버리면 둘째 아들 대학은 어떡하냐면서..
나는 아버지가 회사에서 버티시는 2년 동안 군대에 있었고, 휴가를 나올 때마다 아버지가 확확 늙으시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같이 살 때는 모르다가 오랜만에 봐서 변화가 느껴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이가 그런 나이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혼자서 견디고 계셨던 거였다. 오로지 날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지막 퇴근을 하시던 날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치킨을 사 오셨던 것이다.
군대에 있는 동안 제대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많은 꿈과 계획을 품고 사회에 나왔다. 하지만 바뀌어버린 집안 형편 때문에 꿈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우선 휴학 연장과 함께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부동산에 우리 집을 내놓았다.
앞은 막막했지만 그동안 우리 가족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버지,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부터 저에게 맡기세요.'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모으고 장학금을 타가며 대학교를 어찌어찌 졸업은 했다. 아쉬운 소리 못하는 내가 친구들과 대학 동기들에게 수없이 많은 빌붙기를 시전 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주머니 사정으로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은 확실히 적응의 동물이다.
여름 방학을 틈타 건설현장에서도 몇 번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꼭두새벽부터 일을 시작해 해질 무렵까지 노동을 했다. 숨쉬기도 힘든 한 여름의 더위 때문에 현기증이 나기도 하고 땀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빨리빨리 하라는 업체 사장의 고함 소리에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근육에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전해져 왔다.
끝나고 정확히 7만 원을 받았다. 같이 일한 친구와 돌아오는 길에 저녁을 먹고 교통카드를 충전하고 나니 5만 원 남짓 남았다. 나는 그걸로 휴대폰비를 납부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허무하고 허망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땀에 절은 옷을 벗어보니 건설 현장의 자재에 찍혀 온몸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내 몸 상해가며 일했지만 결국 남는 것이 상처와 피멍 밖에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닫고 나니 억울함 같은 것이 밀려왔다.
나는 샤워기 물을 틀어 둔 채 울었다. 그리고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취업준비생 시절의 배고픔에 관한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신림동 고시촌으로 자취방을 옮겼다. 생활비를 줄이려면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겠지만, 취업을 하려면 여러 회사 면접과 시험을 다녀야 했고, 면접 한번 보려고 서울과 부산을 왔다 갔다 해야 했기 때문에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손바닥 만한 답답한 원룸이었지만 신림동이 서울에서는 월세가 가장 저렴했다. 그리고 서울대 도서관도 이용할 수 있고 저렴한 대학교 학식도 먹을 수 있어서 여러모로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생활비 부족은 자취하는 취준생의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때는 어머니께 간간히 용돈을 타서 썼다. 어머니도 넉넉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돈이 떨어져도 어머니께 말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아쉬운 소리는 이상하게 가족들에게 더 하기가 힘들었다.
통장 잔고에 돈 만원 조차 없어 출금도 못하고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날이 많았다. 결제를 할 때마다 혹시 체크카드 잔고가 부족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굶는 날에도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했다가 딴 얘기만 하다가 끊었다. 도저히 돈이 떨어졌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죄도 아닌데 말이다.
전화를 끊을 무렵이면 어머니는 항상 내게 물었다.
"밥 먹을 돈은 있제?"
어머니의 말에 나는 잠시 머뭇머뭇하다 울컥하는 마음을 눌렸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럼요."
한 날은 하루종일 원룸 방에서 공부하고 이력서 쓸만한 곳 있는지 검색해 보다가 저녁거리라도 사 올 겸 해서 밖으로 나왔다. 나온 김에 동네 한 바퀴 돌다가 조그마한 치킨집을 발견했다.
'한 마리 오천 원, 두 마리 팔천 원'
한 마리는 너무 작았다. 얼추 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먹을 거면 두 마리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두 마리를 먹고 나면 당장 내일의 끼니를 또 걱정해야 했다.
가게 안에 손님들은 삼삼오오 시원하게 맥주를 즐기는 모습이 보였고, 출입문 바로 옆으로 난 조그마한 창으로는 주인아저씨가 치킨을 맛있게도 튀기고 계셨다.
나는 가게 앞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하며 질척였다.
'먹을까 말까. 먹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튀겨지는 닭들을 볼 때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치킨의 황금색 튀김옷에 눈이 홀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서러운 마음이 몰려왔다. 고작 손바닥 만한 치킨 때문에 고민하고 흔들렸던 내가 보잘것없어 화가 났다. 이런 상황이 너무 자존심 상했다. 울컥하는 마음에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내 구겨진 자존심과 비참했던 기억 때문에 그 가게 앞은 다시 찾지 오지 않았다.
졸업한 지 일 년이 다되어갈 무렵 나는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첫 월급을 탔다.
퇴근길에 지하철 2호선 신림역 앞의 쇼핑몰로 갔다. 자취방이 있는 고시촌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맞은편으로 항상 보이던 곳이다. 고시촌으로 이사 온 지 1년이 다되어 갔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보진 못했었다.
그리고 정장을 한벌 샀다. 너무 비싸지도 너무 싸구려도 아닌 적당한 가격대였다. 정규직으로 취직해 내 힘으로 처음 번 돈이었다.
나는 탈의실에서 입고 있던 철 지난 양복을 벗고 새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전 양복은 대학교 4학년 때 졸업 사진을 찍기 위해 어머니께서 없는 살림에도 생활비를 쪼개서 그것도 카드 할부로 사주신 옷이었다. 그래도 평생 남는 졸업 사진인데 싸구려 입으면 안 된다고 백화점 브랜드로 사주셨다. 봄, 여름용 정장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 왔다.
그 정장은 대학 졸업식에도, 수없이 많았던 면접에서도 나와 함께 했었다. 첫 출근부터 회식까지 치르면서 구겨지지 않게, 더러운 것이 묻지 않게 신경 쓰면서 입었다. 단벌 신사였기 때문이다.
이젠 새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지만, 벗어진 헌 양복을 보니 지난 힘들고 서러웠던 시간들이 애환처럼 남았다.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먹고 싶었던 치킨 가게로 갔다. 그리고 두 마리를 시켰다.
검은 비닐봉지 속 치킨은 하얀 종이봉투로 감싸져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나는 치킨을 받아 들고 어릴 적 아버지가 사 오셨던 온기가 가득했던 치킨을 떠올렸다.
나는 치킨집 담벼락에 기대서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지금은 프랜차이즈 치킨 두 마리 정도는 언제든 시켜 먹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나는 아이들에게 치킨을 시켜주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릴 적 내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가족들을 위해 갖은 풍파를 혼자 견뎌내시고, 집으로 돌아와 치킨 한 마리로 즐거워하는 아들들의 모습을 보면 행복해하시던 아버지. 내가 기억하는 가장 따뜻한 순간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추억을 물려주고 싶다. 가족, 행복한 시간, 그리고 아빠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