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치킨집 담벼락에 기대 서서(1)

실패교과서

by 안대리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 배를 곯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당시 9급 공무원이 셨던 아버지의 월급은 2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는 물가 싸기도 했지만 실제로 공무원 월급은 박봉이었다.

우리 가족은 화장실이 밖에 있는 다락이 딸린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고, 단칸방에선 아기였던 형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으셨는지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셨다. 그리고 이듬해 내가 태어나게 되었다.


아버지의 시험 준비로 수입이 없던 우리 가족은 먹을 것이 없어 굶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직장을 다니시던 친구분들 덕에 저녁마다 한잔하자며 불려 나가 술로 끼니를 대신 해결하기도 하셨지만, 어머니와 우리 두 형제는 제대로 먹질 못했다.

내가 갓 태어났을 당시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어머니가 자주 굶으시는 바람에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내가 감기에라도 걸려 아플 때면 그때 젖을 제대로 물리지 못해서 몸이 약한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히시곤 했다.


그런 사정에도 친가와 외가에선 우리 가족을 도와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안의 장남이 아니셨고 심지어 어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관심을 못 받는 오 남매 중 셋째인 데다 출가외인 사상이 강한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엔 어느 집이든 넉넉지 않았고, 우리 부모님은 남에게 폐 끼치거나 아쉬운 소리를 잘 못하시는 분들이셨다.

그리고

그 성격은 나에게도 그대로 물려주셨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굶기지 않으려고 왕복 시내버스비만 챙겨 나를 포대기로 업고 형을 안고, 친척집을 전전했다. 아버지가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는 사이, 나와 우리 형은 그렇게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한 시간씩 시내버스를 타고 친척집에 놀러 간다는 명분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다녔다.

그러다 한날은 온 집안을 뒤져도 버스비 할 돈 50원이 없어, 어머니는 아이들을 굶겨야 한다는 생각에 펑펑 우셨다고 한다.


어머니께 전해 들은 그 시절의 이야기는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상상이 잘 안 되었다.

취준생 시절 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편의점 삼각김밥 한 개 사 먹을 돈이 없어 굶어 보지 않았다면, 그때의 부모님이 느꼈을 무력감과 비참함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두 아이의 아빠가 되지 않았다면, 부모님의 사랑과 배려 덕분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후에 아버지는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시고 사기업에 취직하셨다.

월급날만 되면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셨다. 그리곤 당신 옷에 묻혀온 차가운 바깥공기와 뛰어 오신 듯 소주냄새 가득 찬 거친 들숨과 날숨으로 자고 있는 우리 형제를 깨우셨다. 아버지의 한 손엔 퇴근길에 사 오신 '통닭 한 마리'로 우리 형제에게 먹이시고, 다른 한 손은 외투 깊숙이 넣어두었던 월급봉투를 꺼내 어머니에게 건네주셨다.


그 순간이 아마,

내가 기억하는 우리 가족의 '광안리 단칸방'에서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일 것이다.





2부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8. 나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