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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ann Nov 12. 2021

여전히 술 권하는 사회

- 스마트 소설 -

[한층 소리를 높이며 손가락을 하나씩 둘씩 꼽으며, “되지 못한 명예 싸움, 쓸데없는 지위 다툼질,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내 권리가 많으니 네 권리 적으니…밤낮으로 서로 찢고 뜯고 하지, 그러니 무슨 일이 되겠소. 

회(會)뿐이 아니라, 회사이고 조합이고… 우리 조선놈들이 조직한 사회는 다 그 조각이지.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요. 하려는 놈이 어리석은 놈이야. 적이 정신이 바루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술밖에 먹을 게 도무지 없지. 나도 전자에는 무엇을 좀 해보겠다고 애도 써보았어. 그것이 모다 수포야. 내가 어리석은 놈이었지. 내가 술을 먹고 싶어 먹는 게 아니야. 요사이는 좀 낫지마는 처음 배울 때에는 마누라도 아다시피 죽을 애를 썼지. 그 먹고 난 뒤에 괴로운 것이야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먹은 것이 다 돌아올라오고… 그래도 아니 먹은 것보담 나았어. 몸은 괴로와도 마음은 괴롭지 않았으니까. 그저 이 사회에서 할 것은 주정꾼 노릇밖에 없어…”]  

<빙허 현진건 1921년 작 ‘술 권하는 사회’ 중에서>     


남편과 어제 늦은 밤 한바탕 싸웠다. 


나도 남편도 서로 참고 참다가 언젠가 터질 줄 알았다. 

그리고 결국, 어젯밤에 터지고 말았다. 

나보다 주량이 많지 못한 남편이 귀국한 이후 하루가 멀다고 음주 후 귀가하는 일이 많았다. 


온종일 어디에서 뭐 하다 돌아오는지 모르겠다. 

직장인처럼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고 오전 늦게 집을 나오고 어제와 같이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남편은 소위 백수다. 


남편이 일을 못 하면 나라도 일을 해야 하는데 나 역시 취직준비 중이다.

딸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겨두고 그 동네 어린이집에 이번 주부터 보냈다. 

그리고 나는 공무원 시험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쯤 되면 생활비는 어디서 나오느냐 궁금할 거다. 

남편이 독일에서 유학했을 때 쓰고 남은 몇 푼 안 되는 유학자금으로 그야말로 '연명 생활'하고 있다. 

그나마 시댁이 신혼 초에 마련해준 조그만 아파트라도 있었기에 거리에 나 앉지는 않고 있다. 

나는 남편이 뭘 공부했는지 잘 모른다. 

무려 8년간을 곁에서 같이 살았건만 내가 모르는 공학 분야라 난 알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던 날 우리는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로만 알았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남편은 꽤 힘겹게 공부한 것만은 사실이다. 

독일에서 학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어렵다는 걸 그 정도는 나도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난 남편을 믿었고 그런 남편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의 학위취득과 함께 우리는 더 이상의 비자 연장을 받지 못하고 급하게 귀국해야 했다. 


남편이 원하는 교수 자리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남편 말로는 대중적인 분야의 연구로 학위 받은 게 아니라 남들이 안 하는, 특히 우리나라에선 관심도 없는 분야를 연구해서 학위를 받다 보니 어렵게 공부하고도 국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대학에서 가르칠 일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참 내가 듣고도 어이가 없었다. 

그런 걸 모르고 공부했냐고 따졌더니 언젠가는 바뀔 줄 알았다며 그야말로 답답한 말을 했다. 


정말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분야인데 아직 자기의 역할을 못 하게 만드는 이 사회가 원망스럽다며 그렇게 사회 탓을 하는 것이다. 

대학의 은사들을 찾아뵙기도 하고 여러 학회에 자신의 논문도 알리고 백방으로 분주하게 자신이 연구한 분야를 알려서 대학에 새로운 학문 분야를 도입하려 했으나 교수들이 이해는 하고 공감은 하면서도 기존 제도와 그들만의 연구세계에 이단적인 독일 박사를 배척한다는 이해 못 할 이야기만을 늘어놓곤 하였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학교수 집단은 오직 미국박사, 일본박사들만 판치는 편협한 패거리 문화로 모여 연구하고, 우리 미래와 미래세대에 꼭 필요한 분야를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려 한다는 거냐며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따지자 너가 뭘 알겠다고 자신이 마누라에게 한풀이했는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하여 기분이 상했던 적도 있다. 


그리고 어제 남편이 술에 취해 귀가했을 때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의 남편 처지가 자신과 똑같다면서 100년 전 조선이나, 100년 후 한국은 어찌도 이리 변한 게 하나도 없냐고 술주정이었다. 

더구나 소설 속 아내 역시 나와 비슷하다길래 뭔 소설 타령인가 싶었다.

그래, 내가 봤을 때 그건 분명 술주정이었다. 


난 솔직히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가 뭔지 몰랐다. 

뭔가 싶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살펴보니 살짝 남편과 비슷한 남편 얘기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를 두고 ‘사회’를 요릿집 정도로 아는 그런 무식쟁이 아내에 빗댄 것 같아 남편이 조금은 괘씸도 하다. 


어제 오전 딸아이 보러 엄마 집에 갔다가 오빠 식구들을 만났다. 

네 남편 저러다 폐인 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해 주는데 속이 상했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생활비 하라며 슬그머니 돈 봉투를 가방에 찔러 넣어주었다. 

그걸 남편이 귀가했을 때 말하며 도대체 언제 취직할 거냐고 신경질적으로 물었는데 그의 자존심을 그렇게 긁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대판 싸운 원인이 됐다. 


남편이 어젯밤에 싸우고 나서 취한 채로 다시 집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나가다 말고 주머니에서 뭔가 잊은 듯 주섬주섬 꺼내더니 돈 봉투를 내놓았다. 

손녀 어린이집에 보내는데 보태쓰라고 할아버지가 주신 거란다. 

시댁이 지금 우리를 도울 형편이 아니라는 걸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등을 돌리고 밤늦은 시간 다시 집을 나서는 남편의 기름때 낀 안경 속 충혈된 눈을 볼 수 있었다. 


새벽녂에 들어온 남편이 또다시 늦은 오전에 집을 나선다.

그런 남편 등에 대고 외치고 싶었다.


“이 바보야, 나는 그래도 사회가 뭔지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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