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은 자를 질책하라
글 잘 쓰고 있어?
평범한 안부 인사에 한참이나 답을 망설였다. 그냥 뭐 똑같지. 똑같이 잘 쓴다는 소리인지 아닌지 모호하게 말끝을 흐린다. 알아서 들어주길…. 나의 나태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며 구직활동을 중단한 지 2년. 햇수로 3년째 접어들면서 주부로 본업을 살아가는데 익숙해졌다. 문제는 부업이다. 생이 어디 계획대로 흐르겠냐만 본디 주업으로 삼고 싶었던 글 쓰는 일은 여전히 더디다. 다행히 좋은 선배의 배려로 용돈벌이 부업을 몇 번 해 보았지만, 그마저도 일감이 점점 줄어든다. 소질이 보이지 않으면 얼른 정신 차리고 다른 일 알아보리라 다짐했으나, 2년의 시간은 지방으로 마블링되어 뇌 속에 가득하다.
처음 무모한 결심을 시도했을 때를 떠올린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이미지를 동경했을 뿐인가? 혹여 작가라는 이름에 환상을 쫓은 것은 아닌가? 소설가들이 글을 짓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며, 창작의 고통을 수많은 담배로 태운다 하는데, 나는 평안하다. 무료하다. 건강하다.
매주 수십 장의 원고를 창작해 내야 하는 목회자의 고충을 짚어보다가, 나를 돌아본다. 한 주에 A4 한 장 습작을 쓰는 것조차 게을렀던 나 말이다. 아니 게으른 나 말이다. 밥을 짓듯 글을 지어내야 할 마당에 키보드 두드리는 횟수보다 핸드폰 화면 두드리는 횟수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겨우 페이스북 좋아요 누르면서. 애초에 페이스북에 몇 자 적는 걸로 취미를 삼고, 몇 사람의 반응에 기분이 좋으면 그걸로 된 것 아니었나? 왜 글을 쓰겠다고 했지?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은 해 보았나? 시 쓰고 싶어? 소설 쓰고 싶어? 남들이 조심스러워 잘 묻지 않은 질문으로 스스로를 다그친다. 사람들은, 내가 한참 가라앉은 마음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늘 조심한다. 행여 내게 묻는 안부가 상처가 될까 싶어 격려와 응원이 주를 이룬다. 어느 누구도 질책하지 않는 삶. 나태가 가장 사랑하는 온도. 안락함에 젖은 습도. 녹이 스는 속도만큼 삶의 부식.
언젠가 생각만 해 놓았던 습작 연재를 시작하려고 한다. 한 글자의 글감을 찾고 그것이 품은 세상을 실처럼 뽑아보자. 세상이라 거창하게 말하지만 내가 바라보고 내 손에 닿을 만큼의 폭에 불과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뽑은 실로 옷감을 짓듯 글을 쓰는 것. 밥을 짓는 것처럼 반복해서 훈련하는 것.
목표는 언제 든 글은 잘 쓰고 있어? 라는 안부에 모호하게 답하지 않는 것이다.
글을 짓는 것이 재미있어서 못 견딜 때까지.
오늘의 한 글자는 “글”이었다. 초라한 나의 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