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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귀새끼 Mar 13. 2018

본업 주부

<소리> 지 2018년 2,3월호 게재 글.

본업은 주부고요, 부업으로 가끔 일감 받아서 글 쓰는 일 해요


    이런 대답을 듣고서야 사람들은 안도하는 눈빛을 보인다. “집에서 살림해요”라고 하면,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든 처음 인사하는 사이든 어색하게 웃으며 주저한다. 몇 초의 여지를 주지 말고 바로 부연설명을 해준다. 이제 좀 사람들이 편하게 반응한다. 
   힘 내.  자꾸 무슨 힘을 더 내라는 거지?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쉬워요, 지금 사표 낼 수 있다면. 
   요즘은 남자들도 많이 그런다더라.  더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집에 들어온 지 3년째. 남자가 살림한다고 특별히 다를 게 뭐 있겠나.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애들 등하굣길 챙기고 다 똑같지. 써놓고 보니 별 거 없네. 주부의 일상은 늘 진부한 한 문장이 전부다. 가장이 버는 돈으로 집에서 놀고먹는 줄 아는 사람이 많겠지? 뚜렷한 성과가 없고, 출퇴근이 없으며, 내가 아닌 아이들의 스케줄에 맞추어진 일상의 반복. 병가도 없고, 승진도 없다. 상여금은커녕 연봉협상도 없다. 프리랜서처럼 폼 나는 명칭도 없다. 우리가 놀고먹는 모습이다. 


    맞벌이를 하다가 수입의 반이 줄은 셈이니 결코 쉽지는 않다. 다행히 삶의 질은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다. 색시가 진작 검소하게 살림을 꾸려간 탓이다. 이쯤에서 눈치챈 사람도 있을 텐데, 예전의 나는 육아와 살림을 일하는 색시에게 맡긴 못난 남편이었다. 내가 번 돈도 나 위해 쓸 줄만 알았다. 그런 내가 주부라니.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 살림을 시작한 초보 주부. 자취 생활을 해본 적도 없다. 집을 예쁘게 꾸미거나 DIY의 취미도 없는지라 서툰 모습 그대로 산다. 살림 잘한다는 소리 듣고 싶은 로망도 없다. 식구들이 모두 나간 월요일 아침, 청소를 마치고 혼자 커피 한 잔 내릴 때는 가끔 그냥 이대로 살아갔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가도 고개를 흔든다. 정신 차려. 


    굳이 ‘본업’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가며 전업주부 소리를 피하는 이유는 색시 때문이다. 무슨 대단한 꿈을 펼친답시고 구직을 포기한 채 집에만 있는 남편을, 색시는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색시에게 늘 미안해하며 집에서 쭈그려져 사는 건 아니지만, 자랑스럽게 전업주부로 살겠노라 말할 순 없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기도 하고 배우자의 것이기도 하니까. 아, 딸들을 잊고 있었네. 주부의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기도 하고 배우자의 것이기도 하며 아이들의 것이기도 하다.  


    작년 색시 생일 때. 언제나처럼 넷이서 케이크를 놓고 후짝짝을 했다. 올해는 조금 비싸고 양이 적은 조각 케이크로 샀다. 색시가 교회에서 생일 케이크를 하나 선물 받았다. 이건 또 언제 다 먹나. 다음 날,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청소 얼른 마치니 여유로운 시간이 생긴다. 이럴 때 가장 아쉬운 것이 동네 친구. 전화해서 ‘차 한잔 하러 건너와.’라고 할 만만한 친구 하나 없다. 공짜 케이크 생긴 핑계로 같이 커피 마시면서 수다 떨면 좋을 텐데…. 아이들 같은 반 친구 엄마끼리의 네트워크가 늘 부럽다. 결국 이틀 내내 점심때마다 혼자 먹어서 해결했다. 다들 집에서 편하니까 살찌는 줄 알겠지? 


    지난달 가입한 육아하는 아빠들 커뮤니티에 들어가 본다. 게시판에 글이 좀처럼 안 올라온다. 마지막 글이 올라온 지 이틀이 넘었다. 가입할 수 없는 성중맘(성동구/중구) 카페는 사람도 바글바글 매일 재미나겠지? 달력을 본다. 주부 학사 기도회 날짜를 확인한다. 다음 모임엔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면 좋겠다. 처음에 여기 나가는 건 또 얼마나 조심스러웠던지. 주부 학사라면 으레 동성들의 모임을 기대했다가 시커먼 남자가 불쑥 찾아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걱정했다. 기도보다 수다가 그리워서 찾았고 다행히 환영받았다. 계속 환영할지는 모르겠지만. 


    주부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주부의 삶을 동경해본 적도 없다. 그냥 살아가는데 필요해서, 상황에 맞추어 살다 보니 지금처럼 지낸다. 평안한 마음으로 비교적 만족스럽게 살고 있지만, 혼자 행복한 티는 함부로 낼 수 없는 애매한 모습으로 말이다.  

    조금 외롭게 잘 지내고 있다. 


    아,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안 나네. 벌써 끝났나. 빨래 널어야지. 





주부로 조회한 이미지는 하나같이 '행복한' '여성'들의 표정 뿐이다. 


https://pixabay.com/ 에서 이미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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