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바스 Jun 15. 2021

사활을 걸었습니다 #01

저는 사활걸 준비가 안됐어요

***회사에서 오디오드라마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국내 유명 IT기업으로 거대한 자본력과 다양한 플랫폼을 운영하는 회사였다. 팀장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오전 10시 ***회사에 도착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 마주치던 초록색 유리로 지어진 회사에 들어와 보니 신기했다. 국내 유명 대기업으로 손꼽히는 회사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꿈의 직장으로 소개되던 회사였다.


로비에 도착한 나는 미팅 담당자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가 내려오는 동안 잠깐 시간이 났다. 나는 마치 시골에 살던 촌놈이 서울에 처음 상경하여 놀라 구경하듯이 주변을 살폈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진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로비만 봐도 "대기업 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팅 담당자가 허겁지겁 내려왔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뒤 로비에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 카드를 받았다. 수십대의 엘리베이터 중 하나를 타고 중간 층으로 이동했다. 미팅룸은 사무공간에서 꽤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긴 통로들을 걸어 다니며 여러 장소를 둘러볼 수 있었다. 사무실, 휴게실, 화장실 등 모든 게 정갈하고 깔끔했다. 무엇보다 쾌적한 업무환경으로 일하고 싶은 분위기를 잘 구성해 놨다.(사실 방문은 2번째다. 이 회사의 업무 환경을 볼때면 어떻게든 이직 하고 싶다는 생각 든다)


회의실에 도착 후 팀장님과 나는 미팅 준비를 했다. 노트와 아이패드를 꺼내 우리 팀 내부의 제작 일정을 다시 살펴봤다. 10분 뒤 ***회사의 팀장님과 담당자분들이 들어왔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과 함께 스몰 톡을 나누며 간단한 인사를 했다. 매일 같이 메일, 전화, 메신저로 업무 커뮤니케이션을 해왔었지만 직접 대면하니 서로 머쓱하기도 했다. 사회 이슈, 날씨, 일 이야기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회사의 오디오 드라마는 '외주제작'형태로 작업은 진행된다. 그렇기에 제작 일정, 캐스팅 라인업, 대본, 퀄리티 검수 등 세밀한 부분 하나하나 담당자에게 컨펌을 받고 진행해야 한다. 회의는 ***회사의 팀장님의 주도로 진행됐고 올 한 해 계획하고 있는 웹소설 빅타이틀 제작 리스트를 쭉 소개해줬다. 제작 일정과 퀄리티 적인 부분에서 이번만큼은 더 높은 사업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 강조했다. 그중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담당자님이 사극 웹소설 제작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7년 전 출시된 사극 작품으로 내부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듯했다. 작품의 트렌드가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깐깐한 담당자님은 성공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작품은 유명 작가님의 사극풍 웹소설이었다. 이미 드라마로 제작되어 유명 배우가 출연하기도 했다. 줄거리도 탄탄하고 등장인물들도 다양하고 구체적인 좋은 작품이었다. 다만 7년 이상 지난 터라 트렌드와 소비 타깃층을 중요시 생각하던 ***팀장님은 제작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깐깐한 담당자님은 "성공할 수 있다"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결국 깐깐한 담당자님의 확고한 의지에 제작이 결정된 작품이었다.  


"이번에 사활을 건 작품입니다. 효과음, 성우진 구성이 화려했으면 좋겠어요. 인물별로 다양한 목소리를 캐스팅하면 좋겠어요. 청년부터 중년까지 다양하게요. 그리고 멋진 사극풍의 한국 음악들로 전부 사용하고요"

"그렇군요.. 네네.. 그런데 효과음이 화려 하다는 건 어느 정도의 수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음.. 인물이 움직일 때마다 생동감을 더해줄 수 있는 한복 소리, 걸을 때마다 들리는 발소리 뭐.. 구체적으로 전부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이거 잘 안되면 저희 이제 더 이상 못해요. 팀 옮겨야 될 수도 있고요"


나는 이 작품에 사활을 걸 준비가 안됐다. 분명 큰 투자금액이 투자되는 제작 사업이지만 난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 분명 사활을 건 작품인 만큼 깐깐한 담당자님은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작품의 완성도가 아무리 높다고 한들 계속해서 피드백을 던질게 분명했다. 제작 요청 기간도 당혹스러웠다. 1800분 이상 되는 작품의 분량을 녹음 편집까지 6개월 내로 마무리해달라는 것이었다. 화려한 효과 임팩트와 한국풍의 음악사용까지 해야한다. 더군다나 포인트 되는 국악풍 음악을 최소 2곡정도 제작해야한다. 이 프로젝트 외에도 다른 주 업무도 있었다.


일단.. 우리 회사의 근무환경은 그렇게 좋지 않다. 최근 들어 웹소설 제작이 늘어나면서 야근이 많아졌다. 그러자 주변 팀에서는 "제작팀이 일이 왜 많냐?", "팀을 나눠야 한다"는 둥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그러자 회사는 야근하는 것에 눈치를 주기 시작하고, 주말근무는 최소 3일 전 근무 계획서를 올려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업무가 끝나면 근무 결과 리포트를 정리해 매번 결재를 받아야 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야근 시 지원되던 저녁 식대 8천 원도 취소됐다. 웹소설 제작에 투입된 PD들이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식대지원이 취소되었다. 야근 택시비 지원은 월 쓸수 있는 인당 금액 한도를 걸어버렸다. 결국 부모님, 친구들이 늦은 시간 자가용으로 데리러 오는 일이 빈번해졌다.


몸으로 때우는 우리 제작팀의 매출은 작년대비 3배 이상 올랐다. 회사 최초의 레전드 매출액을 달성했다. 그런데 아무런 보상도 없고 더 높은 달성 목표만 생기게 됐으니 사활을 걸고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틈이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나는 사활을 걸고 매일 야근하며 제작할 수 있을까? 깐깐한 담당자님의 "사활을 걸었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짧은 순간 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깐깐한 담당자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사활을 걸어 죽을힘을 다해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은 불가능합니다. 절대 불가능해요"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부적으로 검토해보고 의견을 전달드린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오전 회의가 마무리되자 근처에 있는 일식집을 예약했다며 점심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비싼 일식집에서 식사대접까지 받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디저트까지 얻어먹었으니 이제는 무조건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아직 정식으로 제작을 의뢰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부담이 됐다. 분명 이 작품을 맡게 된다면 깐깐한 담당자님의 초강력 검수 프로세스를 거쳐 제작이 진행될 것이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촉박한 일정까지 맞춰야 하니 부담이 너무 컸다.


작품을 맡을 생각에 벌써부터 스트레스가 쌓여 갔다. 영상처럼 인물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다양한 소리와 화려한 효과음으로 제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만큼 제작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한 땀 한 땀 음성 싱크와 걸맞은 효과음과 음악을 찾아야 하는 고통이 매우 크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거는 건 좋다. 그런데 나는 아직 사활을 걸 준비가 되지 않았다. 외주를 받아 제작하는 나에게도 사활을 걸 만큼 무언가가 필요하다. 대게 큰 프로젝트의 제작을 담당하면 나에게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여 왔다. 비싼 일식집에서 식사대접까지 받았던 이번 작품은 어떻게 할 것인가? 햄릿처럼 야근으로 '죽느냐 사느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웹소설은 그런 작품 아닙니다 #0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