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시은 Jan 30. 2021

비를 좋아하세요?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된 이유

나에게는 여고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아빠와 둘이 생활하는 결손가정이었지만 늘 당차고 씩씩했다.

승용차도 없이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농사를 지으시는 아빠를 자랑스러워하고 도시락 반찬으로 치킨무를 싸오면서도 "어제 치킨 먹고 남아서...^-^;;"라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친구였다.

친구들과 햄버거 가게만 갈 줄 알던 나에게 호프집을, 노래방을 알려주었던 친구.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는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결석하는 날이 많아졌고 학교에 와도 선생님들께 꾸중 듣기 바빴다.

그렇게 점점 나와 멀어지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교실에 오셔서 그 친구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위로를 하고 싶어 친구를 찾아갔는데 친구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동네분들하고 막걸리 한잔 드시고 내가 너무 안 와서 버스정류장으로 나 데리러 나오시다가 사고 나신 거래."

그렇게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그 친구가 나는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본격적으로 친구의 방황이 시작됐다.

학교를 나오는 날보다 안 나오는 날이 많아졌고, 담임선생님은 따로 불러 같이 어울리지 말라고까지 말씀하실 정도였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친구의 방황이 길어질 무렵,

결혼해서 수도권에서 남편과 치킨가게를 하고 있던 친구의 언니가 친구를 찾으러 나섰다가 사고를 당했다.

가족을 모두 잃은 친구가 걱정이 됐지만 그때도 그 친구는

"미친 ×. 거기가 어디라고 오토바이를 타고 오냐고~"하며 덤덤하게 노래방에서 진주의 '난 괜찮아'를 불렀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친구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얼마 뒤 결혼을 해서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아이들 커가는 이야기로 일상을 공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일을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 후로 나에게 정수기, 비데, 가습기 이런 가전제품들을 구입하라고 했다.

나는 "애들 좀 더 크면 하지 아직 애들 어린데 왜 일을 하냐"라고 질책했는데 친구는 "집에서 애들만 보니 답답해서..."라며 웃었다.

나는 우리 집 제품들을 렌털로 쓰고 있어서 아직 의무 사용기간이 많이 남았으니 끝나고 들어주겠다고 했다.

실제로 대부분 4년가량 렌털 의무사용기간이 있어서 바로 바꾸기는 어려웠다.

일을 하느라 바쁜지 친구는 연락이 해졌다.

가끔 통회가 돼도 둘째 딸이 자기를 닮아 너무 예뻐서 미스코리아 시켜야 되겠다, 셋째가 너무 많이 먹어서 돼지가 되겠다 등 일상적인 얘기가 통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다가 나에게 갑상선암이 찾아왔고 나는 나 돌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세 살배기 아이를 떼어놓고 입원과 수술을 하느라 주위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살아내느라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그 친구의 비보를 들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친구는 그렇게 잘해준다던 남편과는 오래전 이혼을 했으며 위자료로 받은 아파트도 사기를 당하고 혼자서 세 아이를 양육했는데 양육비 조차 받지 못해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마저도 신통치 않아 대출이며 사채로 제품을 사서 금전적으로 힘들어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 친구를 그렇게 힘든 결정을 할 수밖에 없게 내몰았던 친구의 속사정을 들으면서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친구라면서, 나는 왜 전혀 몰랐던 걸까?

어렵게 제품을 권유했을 친구의 마음을 생각하니 별생각 없이 거절했던 나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한동안 힘들어했던 나는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했고, 꾸준히 상담도 받았다.

상담을 받으면서 친구에게 미안해하던 내면에 나에게 전혀 힘든 내색 하지 않았던 친구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이 숨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원망하고 후회해도 다시 돌아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권유로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원망과 배신감 대신 친구가 너무 좋아했던 비를 좋아해 보기로 했다.

친구는 비를 참 좋아했다.

축축한 비를 너무 싫어했던 내게 친구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슬픈 사연이 있는 거래. 뭔가 있어 보이지 않냐?^-^" 라며 우산도 없이 옷이 젖도록 비를 맞곤 했다.

"우산 써도 어차피 옷이 젖을 거야. 어차피 젖을 거 그냥 확실하게 젖자!"

그렇게도 비를 좋아하던 친구였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나도 비를 좋아하게 됐다.

똑똑똑 내리는 빗소리가 친구가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친구의 말대로 뭔가 슬픈 사연이 있어보기도 하는...

그 뒤로 친구에 대한 미안한 마음 서운한 마음 대신 비가 내리면 그 친구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후드득. 후드득 빗소리가 친구가 전하는 안부 같기도 하다.


앞전에 썼던 '처방전이 필요할 때'는 이 친구를 생각하면서 썼던 글입니다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우리가 목이 아프고 눈이 아프면 병원을 찾듯이 마음이 아플 때도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혼자 절망 속에서 헤맨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으니까요.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을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꼭 받아보시기를 바라요. 꼭.



작가의 이전글 어둠 속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