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LASS 컬럼 : 슬기로운 퇴사생활
해질녘이면 찾는 장소가 있다. 7호선 도봉산역으로 전차가 느릿하게 들고 나는 것을 조망할 수 있고, 누우면 별이 보이는 한적한 곳이다. 이따금씩 장난기가 발동해 전차 안 사람들에게 손을 휘젓고 소리 질러 인사하는데, 한 번도 그들과 눈을 마주친 적이 없다. 창밖 풍경보다 휴대폰을 보는 것이 좋은가 보다. 나는 한가로움에 더해진, 내가 무얼 해도 관심 없는 상황이 매우 만족스럽다. 마치 여행자가 된 것 같아서.
여행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자세히 상상도 해봤다. 아프리카 초원의 나무 그루터기에 걸린 해먹을 집 삼아 사는 내 모습을 말이다. 얼굴은 햇빛에 까맣게 그을리고, 고무 조리에 낡은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다. 석양이 어스름하게 짙게 젖어올 때, 조그마한 모닥불에 옆에 쪼그리고 앉아 몽당연필로 오늘의 기분이나 쓸데없는 상상 따위를 기록하다 마른손을 뻗어 하늘의 별을 움켜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곳에 더 머물고 싶은지, 떠나고 싶은지를.
딱 마음이 내키는 만큼 지구라는 작은 별과 나라는 인간을 느릿하게 탐험하다가 죽는 순간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가 오면 하와이의 작은 마을 힐로에서 생의 끝을 보내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를 점찍어뒀으니까.
하나라도 더 갖춰야 1룩스 더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 믿던, 그래서 모든 일에 불나방같이 달려들던 나의 스물셋에 하와이에서 대학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할 수 있도록 노~오력해야지, 모든 과목에서 올~A를 받아야지’ 불끈함이 가득한 첫 학기는 굉장히 바람직하게 지나갔다. 주마다 두 개의 다른 봉사활동을 했고, 친구들이 모두 여행을 간 방학에도 공사장에서 인턴을 했다. 그런데 2학기가 시작되고 모든 것이 익숙해지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빴을 땐 없던 감정 하나가 툭 하고 터져 나왔다. ‘이렇게 한가로워도 되나?’
처음 경험하는 여유를 견딜 수 없어 ‘지루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로부터 3년 뒤, 하와이의 향기로운 바닷바람과 맞바꾼 청춘의 시간으로 얻어낸, 어느 회사의 가로 120cm 남짓한 책상 위에서 콧물을 훌쩍거리며 그 시절의 지루함을 갈구하게 될 것을 스물셋의 나는 바보같이 몰랐다.
지루할 정도로 긴 휴식을 원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앉은 대리님도, 높이 앉은 팀장님도 휴식을 원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회사에서 6시 정시 퇴근을 독려했을 때 경쟁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몸뚱이가 다시 한 번, 한가로움에 내동댕이쳐져 아파하는 것을 목격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스물여섯의 나는 제대로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이유가 ‘평일 낮 시간에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불쌍한 나를 위해, 평일 저녁과 주말의 모든 시간에 좋아하는 일이라 믿는 것들을 ‘매우’ 하면서 쏘다녔다. 그럴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머리끝까지 쭉~하고 올라갔다가 빵~하고 폭죽처럼 터졌다. 이렇게 살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겠다고 착각할 정도의, 천상의 맛이었다.
어른의 나이라고 생각한 서른이 됐을 때, 새로운 시작을 위해 회사와 작별을 했다. 처음 1년은 마치 하와이에 도착했던 그때처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온몸의 감각들이 깨어나 열일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해도 적당한 긴장감과 행복감을 느끼며 스리슬쩍 지나갔다. 해가 바뀌고, 계획했던 일들이 자리를 잡고 익숙해지면서 꿈꾸던 한가로운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간이 갈수록 하고 싶은 일을 함으로써 맛볼 수 있었던 천상의 맛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시간도 컨트롤할 수 있으며, 금전적인 여유도 생겼는데 왜 만족감이 줄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유를 찾지 못하면 행복감이라고 불리는 뫼비우스의 띠-‘방법을 찾느라 긴장한’과 ‘익숙해 지루해진’ 사이–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직 답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노자의 이야기, 유무상생(有無相生)에서 힌트를 얻어 실험 중이다. 그의 말대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짜릿한 천상의 맛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연습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즘 오늘이라는 하루를 여행 중이다. 이 여행을 시작한 지도 벌써 3년 차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어렵지만 한가로움을 대하는 마음이 완벽한 평온을 찾은 날에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느라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작은 이벤트가 되어 앞에 나타난다. 지금 들어오는 도봉산 병풍에 걸린 7호선 전차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쳐본다. ‘하우 아 유?’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매일이 ‘아임 파인 땡큐’였으면 좋겠다. 하와이는 내 마음에 있는 거니까.
TOP CLASS 매거진에 연재중인 컬럼입니다.
워라밸 연구소, 액션랩 대표
액션건축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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