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와 <스타 이즈 본>을 보며.
<보헤미안 랩소디>는 전설로 남은 QUEEN의 프레디 머큐리를 기리는 영화다. 실존인물이 주는 친근함, 매력적 캐릭터가 갖고 있어야 마땅한 이면적 고독감 등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대 흥행 가도를 달린다. 바로 몇 달 전 <스타 이즈 본> 이라는 또 다른 음악 영화가 개봉하여 입소문을 탔다. 고루한 포스터와 플롯에도 불구하고 꽤나 호평을 받으며 내려왔다.
'진정성'이라는 고리타분한 주제를 갖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영화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예술의 진정성을 논할 때 영화적 완성도를 고려해야만 한다면, 두 영화는 논의의 대상으로 마땅하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삶이 주는 고통을 다룬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진실을 찾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진실에 더욱 닿아 있는 것은 <스타 이즈 본>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디가 멤버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사과하며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오르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프레디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인하며 방황의 시기를 겪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천재적 아티스트의 뒷모습은 최대한 조심스러운 장치들로만 나타난다. 힐끗거리는 남자들의 시선에 반응하는 프레디, 널부러진 하얀 가루과 술병 등 카메라가 잡는 시선에 프레디의 적나라한 사생활은 없다. 먼저 프레디 역할에 캐스팅 된 배우가 프레디 머큐리의 알려지지 않은 문란한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아 촬영을 거부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를 아주 잘 만든 영화다. QUEEN의 멤버들은 살아 있고, 프레디 머큐리는 전설이 되어버려서일까. 조금 더 벗겨진 가면을 보고 싶었던 나에게는 퍽퍽한 식빵을 우유 없이 먹는 느낌이었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한 일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8-90년대의 락밴드 융성기를 돌아보게 한 것, 전설로 남았지만 서서히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던 프레디 머큐리를 다시 끄집어낸 일이다. 그가 전설이 되고 싶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그가 가졌던 인간적 애환이 얼마나 컸을지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는 가려져 있다. 사소함에 사소함을 더한 사실들도 드러나는 세상에서, 비밀로 남겨 둔 것들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가려진 틈이 깊을 수록 사람들이 가져 올 수 있는 매장량이 많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럼에도 프레디 머큐리라는 인물이, QUEEN의 업적이, 락의 정신이 우리를 다시 90년대의 그 무대로 기분 좋게 돌아가게 한다. 그의 무덤을 뒤엎어 본들, 그의 인생에 대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고 도의적 책임을 질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것을 감독은 알았기 때문일까. QUEEN의 음악으로 얼버무린 아티스트의 이면을 나 또한 숨겨주고 싶어지게 된다.
그러나, <스타 이즈 본>은 적나라하다. 마치 그 얼버무린 뒷면의 쓴 맛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한물 간 '락가수'가 등장한다. 그는 무대를 끝내고 차에 앉자마자 술병을 집어든다.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었지만, 알콜에 의존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영화 내내 그와 관객들을 괴롭힌다. 잭슨(브래들리 쿠퍼 역)은 우연히 만나게 된 앨리(레이디 가가 역)의 노래에 매료되어 그녀를 가수로 만들어간다. 잭슨과 앨리의 관계의 시작은 결핍에 의한 끌림이었다. 노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갖고 싶었던 잭슨과 노래를 좋아하지만 확신은 없었던 앨리 두 사람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 각자가 잃어버렸던 혹은 갖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욕망의 추동 때문이 아닐까.
진실은 곧 현실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무대에서 보여지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모습 만은 절대 아니다. 극중에서 앨리가 큰 상을 수상하고 전국 투어를 하면서도 그 부부에게 벌어진 수많은 갈등들은 대중이 알 수 없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삶은 어떠한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숨겼던 에이즈 투병 사실은 그의 무대 뒷면의 현실이 팍팍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가. 진실에 직면한 두 인물들은 어떻게 그 고통스런 삶을 이겨냈을까? 그저 노래했을 뿐인 두 사람에게서 왜 울림을 받았을까?
영화 속 주인공들이 직면한 현실, 인생의 공허를 채우고자 했던 욕망이 추동한 몸짓들이 예술을 만든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과 실제 퀸의 공연 장면, 프레디 머큐리가 관객들과 호흡하며 사용했던 발성들이 담긴 공연들은 유투브를 통해 다시 회자됐다. 이 시대에 상실된 몰입과 헌신된 열정을 향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결과는 아닐까. 대단했던 프레디 머큐리마저 흙으로 돌아갔듯, 상실은 어디에나 있고 인류 문명이 이어지는 내내 죽음은 우리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죽음이 주는 허무감, 상실이 주는 공허를 애도할 힘이 없는 사람들은 삶 속에서 지워내기에 급급하다. 프레디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공연에 퍼부었던 에너지는 지금의 그 많은 공장의 생산물 같은 공연 무대들과는 결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빼앗긴 자리, 아예 없었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선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허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의 뒤에는 요리사의 손길이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의 세계는, 이런 결핍과 상실을 이겨내기 위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채워진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프레디 머큐리와 <스타 이즈 본>의 스타로 거듭난 앨리는 각자의 결핍이 추동한 방향으로 헌신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앨리는 이미 잭슨의 헌신으로 탄생한 스타였다는 것이다. 공허를 채우기 위하여 두려움을 이겨내고 헌신할 때, 아름다움은 피어난다.
보고 싶지 않은 이면, 우리 인생의 수많은 공허들을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와 노래, 순간을 포착한 장면들을 욕망할까? 상실과 결핍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아름답고 치열한 헌신. 잊혀져 간 이야기, 잊혀져 간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이 채운 괴로움. 그것이 예술이 되어 진정성을 갖고 우리 심금을 울린다. 결국 이 영화들조차 사라져가던 전작의 서사들(3번이나 다시 만들어진 <스타 탄생>의)과 물리적으로 사라진 프레디 머큐리를 향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