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9시, 나는 방구석 배우가 된다

by 허배우 actorheo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요? 우리가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2003년 1월, 충남 천안의 연수원 대강당.
수백 명의 동기들 앞에서 쩌렁쩌렁한 전라도 사투리가 울려 퍼졌다. 딱딱하기 그지없던 대본은 내 입을 거치자 생동감 넘치는 대사로 돌변했다. 동기들은 배를 잡고 굴렀다.
​그날 나는 '연극' 수업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수상의 순간, 스물셋의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빛났다. 그때는 몰랐다. 그 무대가 나의 처음이자, 아주 오랫동안 마지막이 될 '배우로서의 순간'이었음을.


​나는 소위 말하는 '악바리'였다.
99학번. IMF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던 시절, 나는 살아남기 위해 대학 생활을 전쟁처럼 치렀다. 경제학과 심리학을 복수 전공하고, 그것도 모자라 경영학까지 부전공으로 삼았다. 남들 다 한다는 휴학 한 번 없이 4년을 꽉 채워 달렸다. 목표는 오직 하나, 낙오하지 않는 삶.


​그 치열함의 보상이었을까. 2003년 1월, 졸업식 학사모를 쓰기도 전에 입사라는 합격 목걸이를 걸었다. B2B 영업 담당자. 그때부터 나의 세상은 철저한 이성과 숫자의 세계였다. 실적, 목표 달성, 효율, 그리고 평가. 심리학도가 꿈꾸던 '마음의 이해'는 영업 현장의 '고객 심리 파악'이라는 수단으로만 쓰였다.


​그렇게 18년을 쉼 없이 달렸다.
나를 멈춰 세운 건 2020년,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둘째 아이가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나의 질주에도 제동이 걸렸다. 2021년 1월부터 2022년 11월까지, 1년 11개월의 육아휴직.


​처음엔 불안했다. 내 커리어가, 내 자리가 사라질까 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느꼈던 그 시기에 나는 새로운 세상과 연결되었다. 바로 화상 회의 앱 '줌(ZOOM)'이었다.


​회사에서는 회의실 감옥 같았던 그 네모난 화면이, 집에서는 무대가 되었다. 아이를 재운 밤 9시, 나는 줌을 켰다. 그곳에는 나처럼 일상에 지치고, 사람에 목마른 이들이 접속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직급도 모른 채 오직 희곡 텍스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났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화면 속 낯선 이에게 대사를 던지는 순간, 2003년 천안 연수원의 그 당돌했던 신입사원이 내 안에서 깨어났다. 직급도, 고과에 대한 두려움도, 엄마라는 무게도 사라진 시간.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나'로 숨 쉬고 있었다.


​이 연재는 20년 넘게 모범생으로, 직장인으로, 엄마로 사느라 잊고 지냈던 내 안의 '배우'를 다시 만나는 기록이다. 차가운 평가에 주눅 들었던 40대 직장인이, 뜨거운 낭독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해가는 여정이다.


​이제 나는 다시 출근길에 오른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내 가방 속에는 노트북뿐만 아니라, 언제든 펼쳐들 수 있는 희곡 한 권이 들어있으니까.


​퇴근 후 9시, 당신은 누구입니까?
부디 이 연재 글이 당신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는 작은 대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