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지구력'을, 희곡은 '눈치'를 길러줬다

새벽 6시 <토지> 낭독에서 밤 9시 <희곡> 연기로의 전환

by 허배우 actorheo

​1쪽부터 100쪽까지, 우직하게 쌓아올린

‘목소리의 근육’


​지금도 생생하다. 초등학생 때 나는 조금 유별난 공부 습관이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사회 교과서 1쪽부터 10쪽까지 배웠다면, 집에 돌아와 1쪽부터 10쪽까지 소리 내어 읽었다.


다음 날 20쪽까지 배웠다면, 다시 1쪽부터 20쪽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했다.


​배운 진도가 나갈수록 낭독의 시간은 길어졌지만, 내 목소리로 문장을 훑어 내려가는 그 리듬감이 좋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일같이 반복했던 그

'누적 낭독'은 내 몸에 활자의 결을 새기는 최초의 의식이었다.


훗날 내가 수만 쪽의 대하소설을 완독할 수 있었던 그 우직하리만큼 단단한 '지구력'은 아마 그때 그 방구석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낭독의 씨앗은 2009년, 첫째가 태어나면서 다시 싹을 틔웠다.


당시 유행하던 '거실 서재화' 열풍을 따라 TV를 치우고 전면 책장과 6인용 원목 식탁을 들여 '우리 집 북카페'를 만들었다.


퇴근 후 그 넓은 식탁에 앉아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호랑이 흉내를 내며 그림책을 읽어주던 그 시간은 나에게 즐거운 '책놀이'였다.


비록 조연이었지만, 내 목소리에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배우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고, 나 역시 글로벌 IT 기업이라는 거대 조직의 숫자에 치이면서 그 소중한 리듬을 잠시 잊고 살았다.




누워 있는 문장에 내 숨을 불어넣는 법을 배우다


​10년이 지나 코로나와 함께 두 번째 낭독의 물결이 찾아왔다. 2021년 1월, 육아휴직을 하며 멈춰버린 커리어에 대한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나는 다시 책을 잡았다.


이번엔 놀이가 아니었다. 치열한 '수양'이었다.


​당시 나는 광주 광산구 평생학습 포털 '배우랑께'에서 신청한 '이야기꽃도서관' 강연을 통해 롤러코스터 성우, 서혜정 선생님을 만났다.


조선 시대 책 읽어주는 남자 '전기수' 이야기를 들으며 낭독이 영혼을 울리는 예술임을 깨달았다.


​"낭독은 호흡과 쉼의 예술입니다. 누워있는 글에 내 호흡을 불어넣어 일으켜 세우는 작업이죠."


​나는 더 깊이 배우고 싶어 '서혜정 낭독연구소'의 보이스 트레이닝 수업을 들었고, <나에게, 낭독>을 교과서 삼아 매일 녹음하고 셀프 피드백을 했다.


낭독의 기본기를 다지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입문서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500일의 사투, 수만 쪽의 활자를 소리로 씹어 삼키다


​초등학생 때의 그 끈기가 다시 발동했다. 배운 기술을 실전에서 체화하기 위해 '숭례문학당' 동기들과 새벽 6시 줌(Zoom)을 켰다.


박경리의 <토지> 20권과 최명희의 <혼불>까지, 장장 1년 6개월의 낭독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매일 새벽 스탠드 불빛 아래서 나는 서희가 되었고, 청암부인이 되었다.


[ 방구석 허배우의 <토지> 낭독 2022년 녹음 파일 링크]

https://m.blog.naver.com/heomammy/222810053160

(출처: 마로니에북스, 토지, 1권 302~306쪽)




22년 차 직장인, 해설자 없는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다


​천하무적인 줄 알았다. 하지만 2023년 복직 후 마주한 '기대 이하의 성적표' 앞에서 나는 무너졌다. 나를 무너뜨린 건 업무 강도가 아니었다. 바로 '관계'였다.


​소설 속에는 친절한 서술자가 속마음을 다 설명해주지만, 현실의 오피스에는 해설자가 없었다. 상사의 비수 같은 말 속에 숨겨진 맥락을 읽지 못해 매일 상처받았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고독한 '지구력'이 아니라, 타인과 부대끼며 감정의 행간을 읽어내는 유연한 '생존력'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무너진 마음으로 서재의 책장을 뒤적이다 먼지 쌓인 얇은 대본 한 권을 발견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제목을 읽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36년 동안 가방 두 개를 들고 뉴잉글랜드를 누비다 결국 쓸모없어진 오렌지 껍질처럼 버려진 63세의 윌리 로먼. 22년 차 유통 관리자인 나의 오늘이 그의 낡은 가방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이건 연극이 아니야. 이건 내 이야기잖아?"




이제는 ‘공부’가 아닌 ‘생존’을 위해 <세일즈맨의 죽음>을 든다


​그날 밤부터 나는 윌리 로먼이 되어 울부짖기 시작했다. 소설은 '지구력'을, 희곡은 '눈치'를 길러줬다. 희곡 낭독에는 직장인의 생존을 위한 세 가지 무기가 있었다.


◇ ​ 머리의 훈련(눈치): 윌리와 상사 하워드의 비정한 대화를 낭독하며, 현실 사무실에서 상사가 내뱉는 차가운 말 뒤에 숨겨진 진짜 의도를 읽어내는 능력을 길렀다.


가슴의 훈련(해소): "나는 껍데기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윌리의 절규에 내 억울함을 실어 뱉어냈다. 22년 동안 벽장에 가두었던 내 안의 아이가 비로소 함께 소리를 질렀다.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 합법적인 카타르시스였다.


몸의 훈련(자존감): 웅얼거리는 '허 프로'의 목소리를 버리고,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단단한 목소리로 윌리의 자존심을 연기했다. 몸이 펴지니 무너졌던 자존감도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나는 오늘 밤도 방구석 허배우가 된다.

100평 사무실을 탈출해, 윌리 로먼과 내가 단둘이 만나는 이 안전하고 따뜻한 '한 뼘 극장'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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