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내 안의 '벤'을 해고했다

괜찮은 척하는 연기를 멈추고, '나의 아저씨'가 되기로 했다

by 허배우 actorheo


​어느 날 출근길, 나는 내 안의 ‘벤’을 떠올렸다.


​회사는 나를 증명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몇 번의 평가, 몇 줄의 숫자, 몇 개의 직함으로 내가 설명되는 곳. 나는 지방대를 나와 운 좋게도 사람들이 이름만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회사에 들어왔다.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명함의 로고는 내 이력의 가장 앞줄에 놓였고, 그 덕에 나는 늘 “잘 풀린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그 오해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회사에서의 나는 밝은 사람이었다. 후배들 앞에서는 여유 있는 선배였고, 거래처에서는 농담도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회식 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맞추는 법도 알았다. 다들 나를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 말이 칭찬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그 말이 내 본명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점점 역할이 되었고, 역할은 점점 내가 되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몸이 아니라 표정이 먼저 무너졌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 소파에 잠깐 앉아 있을 때면, 하루 동안 억지로 펴고 있던 등이 한꺼번에 구부러졌다. 회사에서는 줄곧 어른이었는데, 집에 오면 설명할 수 없이 작아졌다.


​가장 난감했던 질문은 이상하게도 이런 말이었다.
“아버님 뭐 하세요?”


​악의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그 질문이 나오면 내 안 어딘가가 순간 얼어붙었다. 나는 대답을 고르는 동안, 내가 아니라 내 배경을 평가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짧은 침묵 동안, 나는 사회인이 아니라 출신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 또박또박 말했고, 더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일 아니라는 얼굴을 연기했다. 그 순간의 나는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세일즈맨의 죽음>을 다시 읽다가, 한 인물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


​처음엔 그를 성공한 형,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읽을수록 이상했다. 벤은 늘 현실의 인물이 아니라, 윌리가 무너질 듯한 순간에만 나타났다. 그는 자랑을 늘어놓지만 현재의 윌리를 실질적으로 돕지는 못한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벤은 성공한 형이 아니라, 굴욕을 느끼지 않는 자아 아닐까.


​밖에서 자꾸 작아지는 사람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자리가 좁아지고, 능력보다 속도가 중요해지는 세계에서, 사람은 매일 조금씩 밀려난다. 존중받는다고 믿었던 자리에서 조용히 투명해진다. 윌리가 그랬고, 나도 그랬다.


​그런데 밖에서 이미 작아진 사람이, 집에서까지 작아지면 어떻게 될까. 그건 하루가 끝나는 게 아니라 존재가 끝나는 기분일 것이다. 그래서 윌리는 집 안에서까지 자신을 부풀렸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서사를 붙잡은 것이었다. 벤은 그 서사를 지켜주는 마지막 장치였다.


​나는 그 구조를 다른 이야기에서도 본 적이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은 밖에서 당한 모욕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모함당하고 밀려나면서도, 집에 들어갈 때면 아무 일 없다는 얼굴을 한다. 가족에게까지 초라해지고 싶지 않아서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회사 생활 1년 농사의 결과는 고과로 나온다. 그건 다 안다. 그래서 더 묻지 않는다.
“이번 평가 ,..입니다.”
​말은 들었는데, 이해는 나중에 왔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알았다. 심장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받는 삶.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항의하지 않는 사람, 문제 만들지 않는 사람, 조용히 버티는 사람. 회사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도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괜찮은 척. 아무 일 없는 척. 그 연기는 이미 숙련자였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있으니까. 부모 얼굴이 하루 분위기를 정한다는 걸 너무 잘 아는 나이니까. 저녁을 먹고,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딸아이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몸이 좀 안 좋아. 일찍 잘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몸이 침대 아래로 천천히 꺼져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바닥이 사라지고 어둠이 나를 통째로 삼키는 느낌. 온 우주에 혼자인 느낌.


​그때, 드라마 대사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과 결과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나를 위로하지는 못했다. 그건 강해지려는 말이었지 아픈 걸 인정하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마음속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기억의 필름을 감아, 가장 불안했던 시절의 나를 찾아냈다.
​22년 전, 신입사원 연수원 강당. 정장에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 긴장으로 굳어 있는 스물세 살의 나. 그 아이 옆에는 항상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벤.


​“더 잘해야 해.”
“여기서 밀리면 끝이야.”
“1등이 되어야 존재가 증명돼.”


​그는 나를 채찍질하며 살아남게 했지만 한 번도 나를 안아주진 않았다. 나는 그 아이 앞에 서서 벤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냥 와락 끌어안았다.
​“쫄지 마. 너, 앞으로 22년이나 버틴다.
넘어지기도 하고 오늘 같은 날도 오겠지만, 그래도 너, 끝까지 살아남는다.”


​아이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그건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인정받은 사람의 눈물이었다.
​그날 밤,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오늘 리딩 가능하신 분들?]


​우리 일곱 명. 매주 한 번, 줌에 접속해 카메라는 끄고 목소리로만 대본을 읽는 사람들. 직급도, 회사도, 배경도 없는 자리. 나는 한 글자 보냈다.
[가능]


​줌에 들어가자 검은 화면들 사이로 목소리들이 켜졌다. 그날 참석 인원수에 따라 배역을 나누고 바로 대본 리딩을 시작했다. 우리는 잘 읽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자기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는다. 누군가 동훈의 대사를 읽었다.


“괜찮습니다.”


​이상하게 그 말이 오늘은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내 차례가 왔다. 목이 잠겼다. 예전 같으면 톤부터 고쳤을 텐데, 그냥 갈라진 목소리 그대로 읽었다.


​마이크 잡음이 섞인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정적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천천히 하셔도 돼요.”


​그 한 문장이 회사에서 받은 고과보다 내 존재를 더 정확하게 봐주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는 성과가 아니라 숨을 기준으로 사람이 존재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해고해야 했던 건 회사가 아니라, 내 안의 벤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걸.
굽신거려도 괜찮고, 작아져도 괜찮고, 오늘 무너져도 괜찮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걸.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차창에 비친 내 얼굴 뒤로 더 이상 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젯밤 내가 안아준 그 스물세 살의 눈빛이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걸으면서 속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엔 다짐이 아니라 자유의 주문처럼. 굴욕이 나를 정의하지 못하게 하는 말. 평가가 나를 설명하지 못하게 하는 말. 나는 여전히 회사로 향하고 있었지만 인생의 주연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오늘도 나는 일하러 간다.
1등은 아니지만,
아직 살아있는 나를 만나러.


[다음 무대 예고] 당신을 다시 주인공으로 세울 1번의 커튼콜


​Stage 5. 엔딩 다시 쓰기: "내 인생의 시나리오는 내가 직접 쓴다"


※ 이후 윌리 로먼의 가방을 내려놓고,

<바냐 아저씨>의 대본을 들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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