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희곡낭독 책놀이 5 : 엔딩 다시 쓰기

세일즈맨의 죽음, '레퀴엠'에 대하여(음성 낭독 포함)

by 허배우 actorheo

레퀴엠, 산 자를 위한 휴식


​시곗바늘이 밤 9시를 가리킨다.


고등학생 딸아이가 학교 끝나고 스터디카페에서 마무리 공부를 하고 귀가할 때까지 딸 책상은 내 차지다. 업무 현장을 누비던 '허프로'의 가면을 벗고, 나는 이제 '허배우'가 되어 대본을 펼친다.


​오늘 내가 고른 단어는 '레퀴엠(Requiem)'이다.


<세일즈맨의 죽음> 마지막 부분에 홀로 낯선 단어가 적혀 있다. 뜻을 찾아보니, 흔히 죽은 이를 위한 진혼곡이라고 번역되지만, 연기를 하며 알게 된 뜻은 조금 달랐다.


그것은 '긴 삶을 견딘 이에게 비로소 허락되는 완전한 쉼'이었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휘청거리던 <세일즈맨의 죽음> 속 윌리 로먼이 멈춰 선 자리.


그리고 그를 떠나보낸 뒤, 다시 살아야 하는 사람들만 남은 자리.


오늘 나의 연습은 그 텅 빈 무덤가에서 시작된다.


1. 허프로 마음 속에 사는 유령들


​배우는 타인의 삶을 입는 직업이라지만, 때로는 내 안의 숨겨진 나를 끄집어내는 것이 연기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출근 카드를 찍고, 회의실에서 영혼 없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때,


내 마음속에는 사실 세 명의 유령이 살고 있었다.


​성공의 압박에 짓눌려 파멸해 가는 윌리 로먼,

쓸모를 잃고 방 안으로 사라진 그레고르 잠자,

모든 걸 버리고 떠나고 싶었던 스트릭랜드.


​죽고 싶었던 날, 숨고 싶었던 날, 떠나고 싶었던 날들...


이 세 사람은 사실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동안은 이 감정을 '스트레스'라는 납작한 단어로 구겨 넣었지만,


이곳 방구석 무대에서만큼은 그들에게 온전한 목소리를 돌려주려 한다.


​우리는 도망치지 못한 패배자가 아니라,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생존자'이니까.


2. 100년 전의 바냐, 오늘 <케이제약, 반 부장>이 되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의 마지막 선택이 죽음이었지만, 퇴사는 멀고 카드값은 가까운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눈을 들어보니 <바냐 아저씨>가 보였다.


평생을 바쳐 일했지만 빈 껍데기만 남은 47세의 남자.


그의 대사를 읽다 보니 목이 메어왔다. 100년 전 러시아 지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난주 인사 고과 면담을 하고 나오던 내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희곡 낭독의 좋은 점을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번 들려드리는 것이 효과가 좋은데 기존 번역본을 낭독해서 음성파일로 공개하면 저작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냐 아저씨> 러시아어 원문은 저자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롭다고 해서 AI와 함께 러시아어 원문을 나만의 방식으로 각색해 보고 있다.


각색하고 있는 책 제목은 <케이제약, 반부장>


회사에서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 윗분들 앞에서는 삼켜야 했던 그 말들을 대본의 힘을 빌려 토해낼 수 있게 다듬고 있다.


​"전무님, 제가 이 바닥에서 20년을 개처 일했습니다! 당신이 골프 칠 때 나는 김밥 먹어가며 버텼어! 내 청춘 돌려내! 내 20년 돌려내란 말이야!"


3. 연기는 나를 살게 하는 호흡이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침 튀기며 독백을 쏟아내고 나니, 이상하게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현실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무대 위(방구석)의 나는 비로소 억울하다고, 아프다고 소리쳤기 때문일까.


​4. 에필로그 : 다시 출근하는 배우


​낭독을 마치고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어본다.

전문 성우처럼 매끄럽진 않지만, 20년 현장 밥을 먹은 회사원의 투박한 진심이 담겨 있다.

그 거친 숨소리가 나에게 말해주는 듯하다.


"오늘도 죽지 않았고, 떠나지 않았고, 버텨냈다. 그거면 됐다."


​이제 스탠드를 끄고, 대본을 덮을 시간이다.


내일 아침이 오면 나는 월 마감에 쫓기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오늘 밤, 내 안의 슬픔을 설명할 '언어'를 찾았고, 마음껏 울부짖어 보았으니까.


​퇴근 후 9시.


이곳은 나의 방구석이자, 내가 진짜 나를 만나는 유일한 극장이다.


​오늘의 연습, 끝.


​(추신: 이번 글에는 직접 녹음한 <케이제약, 반부장>의 육성 파일을 첨부한다. 나와 같은 전국의 '반 부장'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부록] 오늘의 연습 대본


​작품명: <케이제약, 반부장>


장면: 제1막 1장 (옥상 위, 식어빠진 믹스커피)


원작: 안톤 체호프 《바냐 아저씨》 1막


​(막이 오르면, 케이제약 본사 건물 옥상. 안 차장이 멍하니 난간에 기대어 있고, 청소 담당 공 여사가 등장한다.)


​공 여사:


(쯧쯧 혀를 차며) 안 차장, 또 거서 청승 떨고 있네. 커피 한 잔 타줄까?


​안 차장:


(힘없이) 아뇨, 여사님. 속 쓰려요. 그냥 물이나 한 모금 줘봐요.


​(안 차장, 공 여사가 건넨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안 차장:


... 여사님. 저 입사한 지 얼마나 됐죠?


​공 여사:


글쎄다... 자네 대리 달고 내려왔을 때가... 가만있자, 저기 영풍지구에 아파트 들어설 때니까... 얼추 십 년 넘었지?


​안 차장:


십 년... (쓴웃음) 십 년이라. 저 그때랑 비교하면 많이 변했죠?


​공 여사:


변했지. 암, 변하고말고.


그때는 얼굴이 뽀얗고 눈에 독기가 바짝 서 있었는데.


지금은... 삭았어. 아주 푹 삭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술을 너무 많이 처마셔.


​안 차장:


(난간을 툭 치며)


삭을 수밖에요. 십 년 동안 남의 비위 맞추느라 간이랑 쓸개랑 다 빼줬으니까.


여사님, 그거 아세요? 제가 이 영풍지구 거래처 원장님들 생일, 사모님 생일, 애들 대학 입시까지 다 외우고 다녀요. 새벽 2시에도 전화 오면 튀어 나가고.


그렇게 십 년을 살았는데... 남은 게 없네요.


거울 보면 웬 낯선 아저씨가 서 있어요. 콧수염도 지저분하고, 배도 나오고...


무엇보다, 이제는 뭘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겨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사이)


​안 차장:


아, 한 사람 있네. 우리 반 부장님.


저 양반 보면 짠해 죽겠어. 나보다 더 닳아버린 사람이라.


​공 여사:


(한숨 쉬며) 반 부장 그 양반도 참... 요즘 그 낙하산 전무 때문에 아주 죽을 맛이지?


​안 차장:


말도 마세요. 그 소 전무인지 뭔지, 본사에서 내려온 뒤로 사무실이 아주 쑥대밭이에요.


원래 우리 점심 12시에 먹잖아요? 근데 그 양반은 꼭 1시 넘어서 찾아요. 그럼 전 직원이 배고파 죽겠는데 대기 타고 있어야 해.


어제는 또 뭐라는 줄 알아요? "영풍지구는 공기가 좋아서 비타민이 안 팔리나?"


와... 진짜 확 들이받으려다가 참았네.


그 인간 비위 맞추느라 우리 반 부장님은 지금 휴게실 소파에서 쪽잠 자고 있어요.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공 여사:


아이고, 짠한 거...


옛날엔 반 부장 그 양반이 제일 일찍 나오고 제일 늦게 가고, 눈이 반짝반짝했는데.


어째 이 회사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더 쥐어짠다냐.


​안 차장:


그러니까요. (빈 종이컵을 구기며)


열심히 살면 뭐 합니까. 결국 남는 건 믹스커피 껍데기랑 고과 C등급, D등급뿐인데.


여사님, 저... 그냥 확 사표 쓰고 시골 가서 배추나 키울까요?


​공 여사:


시끄러워. 배추가 니 맘대로 커준다냐? 들어가서 일이나 해. 이번 달 마감 며칠 안 남았다며.


​안 차장:


(긴 한숨) 네, 들어가야죠.


산 자는 살아야 하니까. 엑셀이나 켜러 갑니다.


​(안 차장, 구겨진 넥타이를 다시 조이며 퇴장한다. 씁쓸한 바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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