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희곡을 소리 내어 읽기 가장 완벽한 나이

아들의 분노와 아버지의 슬픔이 내 안에서 화해하는 시간(음성 포함)

by 허배우 actorheo

40대는 서글픈 ‘낀 세대’다.
위로는 늙어가는 부모의 등을 바라봐야 하고, 아래로는 커가는 아이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이 나이가 희곡을 낭독하기 가장 좋은 나이가 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마흔이 되면 우리는 비로소 아들의 대사와 아버지의 대사를 동시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묻는다.

“희곡, 소리 내어 읽어본 적 있으세요?”

대부분 이렇게 되묻는다.

“그냥 눈으로 읽는 거랑 뭐가 다른가요?”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특히 마흔을 넘긴 사람이라면,
희곡 낭독은 남은 인생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고.

1. 스무 살의 낭독: 나는 상처받은 아들이었다

희곡에는 늘 갈등이 있다.
특히 가족극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충돌이 이야기의 뼈대가 된다.

젊은 시절의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읽을 때
늘 아들의 편이었다.

부모의 기대는 숨 막히게 느껴졌고,
부모의 삶은 때로 답답하게 보였다.

아버지의 가난이 부끄러웠던 어린 마음.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던 청년.

그 시절 내가 희곡을 낭독했다면
아마 아들의 대사를 이렇게 읽었을 것이다.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아버지는 가짜예요.
나를 제발 좀 내버려 두세요."

그때의 나는
상처받은 자식의 마음만 알고 있었다.

2. 마흔의 낭독: 비로소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마흔을 넘겼다.
먹고사는 일의 무게를 알게 되었고
가족을 책임지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밖에서 돈을 벌어온다는 일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삼켜야 하는 일인지.

어떤 날은 자존심이 구겨진 채 집으로 돌아온다.
그래도 현관문을 열기 전, 잠깐 멈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만든다.

가족 앞에서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어 다시 희곡을 펼쳤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전에는 답답하게만 보이던
어떤 아버지의 대사가
이제는 가슴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사람들은 나를 좋아한다고.”

젊을 때는 허세처럼 들리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말이
가족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던
한 가장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3.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화해

그래서 나는 40대에게 희곡 낭독을 권한다.

마흔의 낭독자는
대본 한 권으로 일인 다역을 연기한다.

아들의 대사를 읽을 때는
내 안에 남아 있는 어린 마음이 말을 한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아버지의 대사를 읽으면
지금의 내가
그 삶의 무게를 대신 말해준다.

아들의 목소리로 묻고,
아버지의 목소리로 대답하는 시간.

그렇게 두 세대의 진심이
내 입술을 통해 같은 공간에 놓인다.

[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민음사, 162쪽]

그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아들은 아들대로
사랑받고 싶어 아팠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가족을 지키느라 외로웠다는 것을.

그리고 대부분의 상처는
누군가의 악의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이 경험은 눈으로만 읽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내 호흡을 실어
그들의 말을 소리 내어 읽을 때,
타인의 삶이
잠시 내 몸을 통과한다.

그것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오래된 감정을 씻어내는 화해의 의식에 가깝다.

오늘 밤, 당신의 배역은 무엇입니까

“알면 사랑하게 된다.”

희곡 낭독을 통해
부모의 배역에 들어가 본 사람은
비로소 부모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토록 완벽해지려고 애쓰던
자신에게도 조금은 관대해진다.

위아래로 치이느라
자기 마음을 돌볼 틈 없는 40대들이여.

오늘 밤
잠시 화면을 끄고
희곡 한 권을 펼쳐보자.

그리고 혼자 있는 방에서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보자.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서툰 대사 한 줄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던
어떤 감정을 녹여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우리는 다시 한번
자기 삶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으로 서게 된다.

[방구석 허배우의 책놀이 처방전]

혼자 희곡을 낭독할 때는
가장 미워했던 인물의 대사를
가장 천천히 읽어보자.

그 인물의 슬픔이
내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올 때,
예상하지 못했던 눈물이
터질지도 모른다.
대개 치유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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