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레나는 한 번도 그들을 유혹한 적이 없다

《바냐 아저씨》, 우리가 오해한 여자 (음성 포함)

by 허배우 actorheo

​다가오는 5월, 배우 이서진이 바냐 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예매해 두었다.

​관람일이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을 맴도는 가장 큰 호기심은 바냐라는 인물의 연기 변신이 아니다. 오히려 이번 무대의 연출자가 옐레나를 어떤 시선으로 해석했을까 하는 점이다.

​흔히 옐레나는 바냐와 아뜨트로프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일상을 뒤흔드는 인물, 즉 남성을 혼란에 빠뜨리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읽히곤 한다.

과연 이번 연출도 그녀를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유혹자로 그려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옐레나라는 인물의 본질을 놓친 채, 남성 중심적 서사의 안경을 끼고 텍스트를 읽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최근 희곡을 소리 내어 읽기 위해, 《바냐 아저씨》의 러시아어 원문을 펄떡이는 생생한 ‘입말’로 완역하여 출판(POD)하려고 준비 작업을 진행 중이다. 활자에 갇힌 문장을 배우의 호흡이 담긴 대사로 깎아내고, 그 번역 과정에서 AI와 협업하며 체호프가 선택한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와 행간을 치열하게 파고들다 보니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특히 제3막에서 쏘냐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아스뜨로프에게 쏘냐를 여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신 물어보는 옐레나의 행동을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해석해야 할까. 종종 이 장면은 옐레나가 쏘냐를 핑계 삼아 교묘하게 남자를 찔러보고 유혹하는 이른바 ‘여우 같은’ 짓으로 독해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녀의 진심이 그랬을까?


옐레나와 쏘냐의 대화를 들려주고자 한다.

​원작의 텍스트를 입 밖으로 내어 천천히 읊어보면, 옐레나는 결코 남성을 의도적으로 유혹하거나 상황을 쥐고 흔드는 팜므파탈이 아님을 알게 된다. 팜므파탈의 본질은 의도적인 유혹과 권력의 행사에 있다. 그러나 옐레나에게서는 그런 주도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는 지루한 결혼 생활과 폐쇄적인 시골 영지의 삶 속에서 무력하게 방치된 인물에 가깝다. 끊임없이 권태롭고 무료한 삶을 토로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한다.

매력적인 의사 아스뜨로프에게 잠시 호기심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관계를 주도하거나 그를 파멸로 이끌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그녀의 매혹은 계산된 전략이 아니다. 그저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숨 막히는 무료함이 뒤섞여 만들어낸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에 가깝다.

​옐레나를 향한 치명적인 매혹은 그녀의 행동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결핍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옐레나를 둘러싼 ‘치명적인 매혹’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옐레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의 행동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남성 인물들의 결핍과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평생 매형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의 인생을 소비해 버렸다고 느끼는 바냐에게 옐레나는 뒤늦게 마주한 상실을 설명해 줄 하나의 상징처럼 등장한다. 아스뜨로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숲의 파괴를 슬퍼하는 이상주의적 지식인이지만, 동시에 그는 피로하고 권태로운 현실 속에서 잠시 시선을 붙들어 둘 매혹적인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옐레나는 욕망을 발산하는 주체라기보다 남성들의 결핍과 환상이 투사되는 대상에 가깝다. 여성 인물이 자신의 삶과는 상관없이 오직 남성의 시선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되는 순간. 옐레나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자신이 놓쳐버린 청춘의 보상, 혹은 피로한 일상을 잊게 할 시각적 자극. 그들은 옐레나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 한 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최근 공연 예술에서는 옐레나를 단순한 ‘아름다운 민폐 캐릭터’가 아니라, 권태와 억압 속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한 인간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만약 이번 5월의 공연이 이러한 해석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남성을 파멸시키는 가짜 팜므파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부유하는 한 명의 위태로운 인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연출이 그녀의 시각적 매혹만을 강조한다면 관객은 여전히 전통적인 팜므파탈의 틀 속에서 옐레나를 소비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봄, 극장의 불이 꺼지고 막이 오르면 나는 아마 바냐보다 옐레나를 더 오래 바라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옐레나는 정말 그들을 유혹했던 걸까.
아니면
그들이 스스로 흔들렸을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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