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오프라인 <세일즈맨의 죽음> 낭독 모임
2026년 3월 27일 저녁 7시. 약속된 시간이 되자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함께 읽기 위해서였다.
모두 40대 이상, 나를 제외하고는 희곡 낭독이라는 것을 난생처음 해보는 분들이었다. 일상의 피로가 묻어나는 저녁 시간이었지만, 처음 해보는 낯선 경험 앞에서는 묘한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던 대로 가볍게 시작 멘트를 건네고, 다 함께 입을 풀기 위해 혀 체조를 했다. 가장 떨리는 순서인 배역 정하기 시간. 나는 단골 카페에서 모아두었던 작은 원두 설명서 뒷면에 번호와 배역을 적어두었다. 향긋한 커피 향이 배어 있을 것 같은 그 종이들을 뒤집어 놓고, 다 함께 가위바위보를 해 이긴 순서대로 제비를 뽑았다.
내가 뽑은 배역은 주인공 ‘윌리’였다. 극을 이끌어가야 하는, 대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역할이다. 혼자 읽을 때야 문제없지만, 함께하는 자리인 만큼 나보다는 처음 오신 다른 분이 윌리를 경험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배역 바꾸고 싶으신 분 계실까요?”
조심스레 묻자, 내 옆에서 ‘린다’ 역을 뽑았던 분이 슬며시 손을 드셨다. 남자분이셨는데, 아무래도 아내 역할인 여성을 연기하는 것이 내심 어색하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역할을 맞바꿨고, 나는 윌리의 아내 린다가 되었다.
원래 계획은 30분씩 세 번에 나누어 낭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본을 펼치고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예상치 못한 마법이 일어났다. 다들 처음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깊이 몰입했고, 그 집중력에 이끌려 우리는 첫 번째 타임을 40분이나 훌쩍 넘겨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5분간의 짧은 휴식 후 이어진 두 번째 타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서 낭독을 시작하자 목소리에 실리는 에너지가 확연히 달라졌다. 활자에 갇혀 있던 대사들에 각자의 감정이 입혀지고, 참여자들은 어느새 완전히 극 속의 인물로 빠져들고 있었다. 허공에서 부딪히는 대사들 사이로 윌리의 고단함과 린다의 애틋함이 뚝뚝 묻어났다.
새삼 느꼈다. 부모가 된 40대는 이미 생활 속에서 낭독을 익혀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목소리에 감정을 싣고, 문장마다 다른 숨을 불어넣던 시간이 있었기에 처음 만난 <세일즈맨의 죽음>의 대사에도 우리는 금세 마음을 얹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두 번째 타임을 마치고 가졌던 짧은 소감 나누기 시간은 이 모임의 백미였다. 1940년대 미국의 이야기가 2026년 우리의 삶과 완벽하게 포개어지는 순간이었다.
“윌리가 보이는 증상들 말이에요. 요즘 같으면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서 진료받고 약만 제대로 처방받아도 훨씬 좋아졌을 텐데, 참 안타깝네요.”
누군가의 현실적인 감상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비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서른이 넘도록 사회에 온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부모 곁을 맴도는 비프의 모습이 꼭 요즘 시대의 청년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쓰입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이 어떻게 현재의 우리를 위로하고 거울이 되어주는지, 다양한 감상들이 오고 가는 사이 밤은 더 깊어졌다.
그렇게 1막 전체를 낭독하는 데 꼬박 2시간 20분이 걸렸다. 아직 2막과 레퀴엠이 남아 있어, 참가자분들의 열띤 동의를 얻어 2주 뒤에 다시 오프라인으로 만나 남은 이야기를 완성하기로 했다.
무사히 첫 모임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기꺼이 공간을 내어주시고, 훌쩍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신 원장님과 책친구분들 덕분이다.
활자를 넘어 서로의 눈을 맞추고 목소리로 만난 이 저녁의 공기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얼굴을 마주하고 대본을 펼친 날, 우리는 그곳에 함께 존재했다. 덕분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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